땅과 하늘이 구별되지 않는 곳에 그들의 광장이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는 홀로그램 영상으로 재현된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영상 위쪽으로 직사각형 채팅 창이 떠 있었고 채팅 창 맨 위에는 관리자 공지가 상시 노출되어 있었다.
☸관리자 공지►아래 영상은 오늘 새벽 태평로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한 남성을 홀로그래픽 디스플레이로 보여 준 것입니다. 꼼꼼히 살펴보시고 각자의 정보와 의견을 올려 주십시오.
►워킹맘⟴안구 홍채를 스치고 지나간 정보를 분석해보면 그는 오랫동안 많은 양의 문자를 읽었습니다. 글자에 긁힌 자국이 그의 홍채에 선명합니다.
►기레기자⟴ 엄지와 검지의 지문이 닳아져 지문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엄지와 검지로 엄청난 분량의 책장을 넘겼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정말 종이책을 좋아했는지 아니면 종이책만 읽을 수밖에 없었는지 좀 더 깊이 있는 취재가 필요합니다.
►자연인⟴자세히 보면 검지의 지문이 엄지보다 더 망가졌습니다. 검지에는 지문이라고 할 만한 무늬가 거의 없어요. 그는 종이책을 많이 읽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 글을 쓴 작가였을 겁니다. 컴퓨터 키보드를 검지로만 쳤다는 거죠.
►악다구니⟴그의 주변 인물을 상대로 탐문 조사를 해봤는데, 그는 가끔 글을 쓰기는 하지만 한 번도 자신을 작가라고 말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콩깍지Love⟴글을 쓴다고 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죠. 시 좀 쓴다고 시인이고 소설 좀 쓴다고 소설가이고 수필 좀 쓴다고 수필가라 하면, 그 어려운 등용문을 통과하여 문단에 등단한 사람들의 노력과 능력을 인정도,존중도하지 않는 거죠.
☸관리자►그는 자기소개서에 자신을 '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이라고 써 놨습니다. 'mini'와 'novelist'를 조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시처럼 수필을 쓰고 수필처럼 소설을 쓰고 소설처럼 시를 쓴다고 합니다. minivelist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검색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이구아놔⟴ 시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글을 그는 왜 쓰고 있을 까요? 시와 수필과 소설의 경계를 모른 것일까요, 아니면 그 경계를 자기 맘대로 넘나드는 것일까요?
►톡사이다⟴노력도 하고 싶지 않고 능력도 부족하니까 그냥 두루뭉술하게 되는대로 써대는 것이겠죠. 그야말로 혼을 쏟아야 작품이 나오는데 설렁설렁 글을 쓰려는 태도 아닐까요.
►슈퍼초딩⟴ 우리 선생님은 설렁설렁 똥 누듯 글을 쓰라고 하던데요. 재미로 글을 쓰고 거기에 의미를 담으면 글 쓰는 것이 취미가 되고, 그러면 이미 작가가 다 된 것이라고 하셨어요.
►IM5K⟴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똥을 눌 때도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있지요. 아무렇게나 아무 데나 싸 놓으면 화장실을 오염시킬 뿐이지. 그리고 사람들은 글을 '쓴다'라고 하는데 사실 작가들은 글을 '짓는' 사람들이야. 아무나 레고를 조립할 수 있지만 누가 어떻게 조립하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지고,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어떤 말을 누가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잖아. 수없이 생각하고 다듬고 때로는 비틀고 휘감는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신 줄을 팽팽하게 당겨놓아야 하는 거야. 재미로 취미로 쓰는 것과는 다르지.
►메타피쉬⟴그러고 보니 그의 글은 표현이 단순하고 묘사가 투박합니다. 글의 모양이 잎사귀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나 살 없는 생선 가시와 같고, 멋을 부리지 않아 맛도 없어 보입니다. 필력은 물론이고 정신 줄을 팽팽하게 당길 기력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꼭두새벽닭장수⟴그래서 그가 생경하기 짝이 없는 국적 불명의 '미니블리스트'라는 말을 만들고 작가 대신 선생을 호칭으로 사용하는군요. 선생은 딱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을 때 누구에게나 붙이는 거잖아요. 블랙리스트도 아니고 미니멀리스트도 아니고, 미니블리스트? 하여튼 그런 사람들은 제발 쓰레기 같은 글 좀 그만 쓰고 새벽부터 생업에 종사하는 우리들처럼 땀 흘려 일 좀 하라고 그래요. 빈둥거리며 헛소리나 지껄이지 말고. 가만히 보니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노인네의 고리타분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글에 신선한 향기가 있을까요? 노인 내라면 모를까.
☸관리자►인격 모독이나 차별적 표현은 삼가주시기 바랍니다.
►삐딱깝쭉⟴작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글을 쓸 자유가 있습니다. 전문 산악인만이 산에 오르지 않습니다. 배고픈데 요리사가 없다고 굶고 있을 건가요?
►어줍잖은작가⟴ 사람이 글을 쓰는 것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솔직히 먹고살려고 글을 씁니다. 글을 써서 번 돈이 지갑에 들어오기도 전에 빠져나가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대작을 써보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나도아직은 겨울나무나 생선 가시처럼 풍성한 멋과 맛이 없는 글을 쓴다는 비평을 자주듣기는 하지만. 제 글이 치장은 없고 속살만 드러나 있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기둥과 뼈대는 살아 있습니다.
►참교육선생⟴ 선인장은 앙상하지만 조건이 맞고 때가 되면 자기보다 더 크고 고운 꽃을 피웁니다. 어줍잖은작가님도 머지않아기둥에서 솟아나고 뼈대에서 피어나는 눈부신 꽃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돈도 많이 버세요. 응원합니다.
►돈돈돈⟴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뭐 잘못인가요? 글을 쓰는 것도 때로는 밤새우며 꼭두새벽까지 하는 작업인데 일한 만큼 돈도 벌어야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게 알바를 시켜 벌어들인 돈으로 도박을 즐겼던 그분, 대문호였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걸작이며 명작이고요. 다시 말해 돈은 돈이고 작품은 작품입니다.
☸관리자► 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은 글을 써서 벌어들인 돈이 10원도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노숙자라네⟴팔아서 돈이 될 만한 글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는 자신의 글을 시장에 내놓으려는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수능대박⟴내 친구 중에 하나는 수능시험도 보지 않을 거고대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을 거면서 공부는 나 보도 더 많이 해요. 공부는 시험을 보기 위한 것이고 점수를 높이려고 하는 것인데, 헛공부하고 있는 그 친구의 미래가 걱정돼요.
►평생알바⟴글을 쓴다고 다 돈을 버는 것은 아니니까 돈 얘기보다 저 사람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가 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철딱서니⟴혹시 출판업계의 생태계를 흔들어보려는 심산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큰 그림을 갖고 새로운 문예 사조를 이 땅에 심어보려는 의도가 아닐까요. 그것도 아니면 인문학에 흙탕물을 뒤집어 씌워 광합성 작용을 막아 고사시킬 작정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당장 적절한 대책이 필요합니다.
►21세기돈키호테⟴철딱서니님,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새로운 것, 수상한 것, 파격적인 것이 별로 보이지 않아요. 다만 짧은 글 속에 잔잔한 소슬바람 정도를 느낄 수 있지요.
►UR더원⟴그냥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글이더군요. 어렵고 복잡한 글도 아니어서 자투리 시간에 눈요깃감으로 괜찮아요.
►겨우일흔살⟴ 나도 글을 써볼까 합니다. 내 마음속 한구석을 수십 년 동안 차지하고 들락날락하던 옛이야기들이 마침내 삭고 발효가 되어, 어떻게든 털어내지 않으면 내 몸이 삭아버릴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구수한 향기가나는 글이 나와야 할 텐데. 누가 읽어주기나 할는지.
☸관리자►미니블리스트 양 선생이 손을 흔들며 여러분의 관심에 감사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별주부⟴이곳으로 토끼가 도망쳐 와 숨어 있다는 데, 분명 어디선가 낮잠을 퍼질러 자고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