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가 맛있어져 버렸다

바나나 헤이터의 사연

by 함오늘




- 좋아하는 과일이 뭐야?


누군가 물었다.


- 과일? 글쎄, 딱히 잘 안 먹기는 한데... 딸기? 딸기는 맛있더라. 아, 그리고 수박!


그렇게 대답을 마치려 하다가 문득 하나를 덧붙이고 싶어졌다.


- 그리고 싫어하는 과일은 바나나! 왜냐하면 입에 막 텁텁하게 남고, 찐득하고... 그리고 너무 달아.


그래, 나는 바나나 싫어 인간이었다. 러닝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평소 단맛을 별로 즐기지 않아 과일 자체를 자주 찾는 편이 아닌데, 유난히 먹었을 때 찝찝한 과일이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바나나였다. 찐득하게 입 안에 남는 달콤함이 나에게는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어서 기피했다. 그랬던 내가 요즘 장보기 필수템의 제일 우선 순위로 바나나를 꼽고 있다.


우선 바나나가 집에 없으면 불안하다. 떨어질 것 같을 때, 즉 1~2개 남아 있을 때에는 무조건 바나나 한 송이를 마트에서 하나 더 데려와야 마음이 편안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처음에는 러닝 관련 영상을 본 것이 시작이었다. 러너들의 과일, 바나나. 오오, 그래? 하긴.... 힘이 없을 때 바나나 하나를 먹으니까 에너지가 충전되는 경험을 했던 터라 솔깃했다. 정보를 얻은 다음날, 러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바나나를 샀다. 열심히 뛰어 준 나에게 내리는 보상으로 먹는 바나나 한 입, 그게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그다음 날에는 러닝을 하러 가기 전에 바나나를 하나 집었다. 놔두면 금세 새카매지는 바나나 특성상 빨리빨리 먹어 치워 주어야 하기도 한데, 그냥 그 행위가 좋았다. 러닝을 위해 에너지를 보충하는 그 행위가. 잠에서 꺠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찌뿌둥할 때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몸이 무거울 때에도 바나나 하나면 금세 뛸 수 있는 힘이 생겨 날 것만 같았다.


내가 스스로 과학적 실험을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잘 모르겠으나 바나나가 실제로 신체에 주는 영향은 그다지 압도적이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플라시보 효과가 엄청나다. 나 같은 경우에는 특히 그런 것 같다. 마라톤 대회를 나가는 정도라면 순식간에 힘이 나게 해 준다는 에너지젤 같은 것을 사서 체력을 빵빵하게 보충하겠지만... 나에게는 아직 시기상조인 아이템이라고 생각이 든다. 아직은 바나나로도 충분히 행복한 햇병아리 러너로 남아 있고 싶다.


한 날은 바나나 말고도 그냥 어슬렁어슬렁 마트를 구경하고 싶어서 이 코너 저 코너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러너'라는 단어가 적힌 패키지를 보고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러너들을 위한 가루형 스틱이었는데, 고카페인과 타우린이 들어 있어 물에 타서 한 잔 쭈욱 마시면 달리기를 할 힘이 난다는 것이다. 오오... 안 살 수가 없잖아?


평소 카페인에 취약해서 커피는 잘 쳐다보지도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냅다 사 버렸다. 에이, 뭐 어때. 뛰는 데 힘나게 해 준다잖아! 단단히 러닝에 미쳐 있는 나 자신을 또 발견....


러닝은 확실히 중독성이 강한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될 줄은 몰랐다.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내가 살다 보니 바나나를 좋아하게 될지도 몰랐고, 1시간은 내리 달릴 수 있는 체력을 가지게 될 줄도 정말 몰랐다. 이래서 인생은 계속 살아 보고, 또 살아 봐야 하는 건가 싶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어쩔 수 없이 현재 시점만 살아갈 수밖에 없어서 자칫 하다가는 한 상황에 매몰되어 모든 걸 단편적으로 바라보기 쉽지만 달리고 달리다 보면 인생이 꽤나 입체적이라는 게 느껴진다. 나는 영원히 A 상태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 샌가 B 상태에 머무는 인간이 되어 있고, C 상태까지 바라보게 되는... 그런 신기한 경험도 하게 된다. 더더욱 신기한 건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켜보았을 때 나라는 사람이 많이 변화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결국 '나'라는 전체적인 틀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면 좀 놀랍다.


뭔가 말을 어렵게 풀어낸 것 같지만 어찌 되었든 인생의 여러 챕터를 지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특히나 달리다 보니 머릿속의 먹구름이 조금씩 걷혀서 그런지 더 활발하게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사유하게 되는 듯도 싶다.


떡, 고구마, 옥수수, 감자. 절대 내 돈 주고 안 사 먹던 것들이 맛있어지고, 한 사물을 바라보았을 때 여태껏 떠오르지 않았던 생각들이 슬그머니 떠오를 때. 그럴 때 인생은 참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하나의 인생을 살아가며 생각과 감정이 다채롭게 변화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오로지 현재만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소소한 변화들이 특별하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그토록 싫어하던 바나나가 좋아지는, 달리는 게 한없이 좋아지는, 그런 변화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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