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청안 에세이작가 Oct 23. 2019

우리가 냉장고에 붙이는 것들

이청안 산문집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중에서

   뜻밖의 자리가 마련되어 회사 법무팀장인 변호사님과 맥주잔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를 가만히 보다가 생각이 났는지 이런 질문을 한다.

   "어떻게 그렇게 글씨를 잘 써요? 배웠어요?"

   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겠다. 나는 회사에서 인사, 총무, 홍보, 교육과 관련된 업무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비중 있는 업무가 '총무' 영역이다. 그리고 동료들이 나를 가장 빈번하게 찾는 업무도, 스스로 사명감에 사로잡히는 업무도 '총무' 영역이다. 총무 영역에는 별별 일이 다 포함된다. 거기에는 직원들 생일에 상품권을 전달하는 업무도 있다. 변호사님이 말하는 글씨란, 회사에서 지급하는 생일 상품권 봉투에 축하한다고 적은 캘리그래피. 바로 그거였다. 그저 받는 사람이 좀 더 기분 좋게 생일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그 일이 이제는 그만둘 수 없는 나만의 시그니처가 되었다.

   "아유, 그렇게 잘 쓰지 못해요." 나는 겸손하게 손사래를 치면서 예의상 하는 말씀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변호사님의 다음 말에 극한의 뿌듯함을 느꼈다면 너무 오버일까. "우리 집사람이 글쎄 그거 떡하니 냉장고에 붙여 놨더라고요." 내 글씨가 남의 집 냉장고에 붙어있다. 정말 기분이 좋다. 아니 잠깐! 그냥 'OOO 변호사님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오늘 하루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십시오.'라고 쓴 그 봉투를?! 그러다 불현듯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변호사님의 생일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공하지 않은 어떤 '글씨'를 한 번 더 썼다. 그를 위해서였지만 반쯤은 나를 위한 글씨였다.

   팀장님이 외근을 다녀왔을 때, 나는 오늘이 변호사님의 생일이라고 알려주었다. 둘은 티격태격하면서도 친해 보이는데, 실제로 친하지는 않은 특별한 사이였다. 굳이 따지자면 변호사님이 우리 팀장님을 좀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팀장님에게 변호사님의 생일을 언급했다. 뭔가 우리 팀장님에게 생일 축하를 받으면 그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니나 다를까 팀장님은 "변호사님한테 한턱 쏘라고 하자"며 장난스러운 눈빛을 번뜩인다. 나는 그 장난에 동참할 요량으로 평소 작성하던 상품권 봉투의 글씨 말고, 최대한의 기교를 발휘한 엽서를 한 장 더 썼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OO그룹의 일당백 인재! 최고의 실력자! 법무팀장 OOO 변호사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변호사님이 계셔서 늘 든든합니다. 앞으로도 회사의 구원투수로 활약해주십시오!" 나는 상품권 봉투와 엽서를 법무팀 직원에게 가져다주면서, "변호사님 오늘 생일 축하드린다고 전하고 제가 특별히 엽서도 따로 썼으니까 꼭 맛있는 거 쏘라고 전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잊었다. 엽서의 존재도 그 이유도. 그러니까 변호사님 아내가 냉장고에 붙였다는 '그것'은 상품권 봉투가 아니라 추가로 전달된 엽서였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흘러가듯 일상적인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변호사님을 생각하며 적었던 그 메시지의 의미와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갔던 그 글씨는 진심이었으나 내게는 그 일이 특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변호사님의 아내분 입장에서 생각하니, 그날 내가 장난처럼 적어드린 그 엽서가 그녀에게는 매우 가치 있고 특별한 종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회사 직원들이 내 남편에게 보내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신뢰, 인정. 내가 적은 메시지에는 그런 마음들이 들어있었다. 아마 그녀는 '내 남편이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었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의 일과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상상하고 그를 더욱 응원하고 싶어 졌을 것이다. 내 남편이 회사에서 이렇게나 뛰어난 사람이구나 느끼게 되는 그 부분을 다른 사람이 또박또박 건드려주니 그 글씨를 어찌 냉장고에 붙이지 않고 배겨 날 수 있을까. 나는 다시금 내 업무에 사명감을 느꼈다. 아니, 그 날은 성취감에 가깝기도 했는데 얼굴을 모르는 변호사님 아내 분의 미소를 떠올리면서 그냥 한 번씩 웃음이 났다.


   나는 엄마가 적어 준 생일카드를 냉장고에 붙여 놓았다. 단 두 줄짜리 그 메시지를 볼 때마다 쇄골 사이 목 언저리에 온기가 생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따뜻하다.

   우리는 잊지 않을 것들, 그리고 가장 소중한 메시지, 사랑으로 가득 찬 순간들만을 냉장고에 붙인다. 소중한 사람을 위한 레시피, 아이가 그린 크레파스 번진 그림, 가족사진 같은. 그래서 냉장고 자석은 비싸도 사야 한다. 우리에게 의미를 주고 기쁨을 주는 것들을 잔뜩 지탱하고 있으니까.




https://brunch.co.kr/@baby/8

https://brunch.co.kr/@baby/12

https://brunch.co.kr/@baby/1

https://brunch.co.kr/@baby/16

https://brunch.co.kr/@baby/1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