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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Oct 23. 2019

약자를 위한 자리

경북 문경새재, 소나무 쉼터. 길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사력을 다했기 때문에 눈 앞이 하얘졌을 뿐. 잠깐 쉬다보면 또 길이 보일 것이다.


   벌써 몇 년 전 퇴근길의 일이다. 그 날 나는 지하철에서 할아버지 한 분과 꼬맹이 하나를 만났다. 할아버지는 칠십 대 정도, 꼬맹이는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다. 내 옆에 자리가 났는데 할아버지가 어디서 불쑥 나타나셨는지 재빠르게 꼬맹이를 앉혔다. 꼬맹이는 그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튕겨 나오며 저 혼자서는 앉지 않으려고 한다.

   "다리 아프다며, 어서 앉아."

   할아버지는 손녀를 달래서 앉히려 하였지만 죽어도 저만 앉기는 싫고 할아버지와 같이 앉아야겠다고 칭얼거린다. 나는 앉았던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을 수가 없다. 아직 열 정거장도 넘게 남았는데 말이다.

   "할아버지, 여기 같이 앉으세요."

내가 자리를 양보하며 말씀드리자 할아버지는 두 번의 사양 끝에 손녀와 나란히 하신다. 그 언저리에서 멀어지는 나를 보며 꼬맹이가 헤죽헤죽 환하게 웃는다.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좋은가 보다. 나보다 훨씬 나은 꼬마다. 그래 얼른 쑥쑥 자라서 할아버지께 효도하렴.

   한참이 지나 내릴 정거장이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할아버지와 손녀가 나를 다시 보고 인사를 한다. 할아버지는 "이번에 내립니다. 고마워요." 하시고 꼬맹이는 "언니 안녕!" 한다. 그들의 발걸음에는 흥겨움이 묻어났다. 바라만 보아도 좋은, 함께 걷기만 해도 좋은 흥겨움이란 연인 사이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나는 한참 동안 그들을 염탐하듯 바라보다가 내 눈가가 저릿한 것을 알아차렸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리움에 눈이 감겼다.      


   나는 매일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을 이동에 할애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에는 약자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노약자석, 임산부석 등 이름이 거창한 그 자리들. 그런데 오히려 그 자리들이 아니라면, 자리 양보의 광경을 쉽게 목격하지 못한다. 예전엔 그래도 "여기 앉으세요" 하는 소리를 종종 들었는데. 일단 나부터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이어폰을 꼽고 있어 내 앞에 어르신이 서 있는지 어린아이가 서 있는지 신경을 잘 쓰지 않을뿐더러 약자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다는 생각에 일반 좌석은 지극히 '일반적인 자들'의 것이 되어버린 게 아닌가 싶다.

   그런 편협함이 나를 작게 만들 때 나는 '내 안의 약자'를 떠올리면서 이따금씩 앞을 보려 한다. 나보다 약한 어떤 사람의 편의를 내가 담보할 수 있다면. 보호하진 못하겠지만 내가 그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누군가에게 자리를 양보한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세상에 돌고 돌아서 어느 날 우리 엄마가 심신이 지쳐 지하철의 빈자리를 두리번거릴 때, 가서 닿는다면. 효도는 늘 머리에서 시작해 머리로 끝내는 중이지만, 나는 내가 염탐하던 할아버지와 손녀의 흥겨움을 가슴에 새기면서 종종 앞을 바라본다. 세상 어디에도 약자를 위한 자리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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