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상실한 기사

한병철 읽기(6), 고통의 무의미함, 9월 26일 단상

by 김요섭


이름을 상실한 기사


그 전투를 마지막으로 얼마가 흘렀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만찬과 무희들의 고혹적인 자태, 하렘의 이국적인 문양은 더 이상 그를 고양시키지 않는다. 밤마다 이불속으로 기어들어오는 살갗의 온도와 은쟁반 위의 닭다리의 온기는 시시각각 비슷해진다. 보름달이 중천으로 솟은 늦은 밤, 그는 연회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고통을 주는 완두콩이 사라지면 인간은 부드러운 매트리스로 인해 고통받는다. 바로 삶의 지속적인 무의미함 그 자체가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한병철



그의 문장


칼을 빼서 허공을 향해 겨눈다. 한동안 멈춰 서있던 그는, 달을 힘껏 가른다. 무뎌진 몸이, 순간 감당하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세 걸음을 헛디딘 후 멈춰 선 그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비록 예전의 몸놀림은 아니었지만, 아무것도 베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굶주린 칼은 그의 무의미를 날카롭게 잘라냈다. 칼날에 반사된 밤의 푸른빛은 그의 얼굴을 예리하게 비춘다. 늘어진 살과 달리 두 눈은 칼끝처럼 예민해졌다.


이름을 상실한 기사는 다시 자신의 첫 문장을 쓰려한다. 한동안 잊고 있던 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그것은 거친 언어로 불만을 토로한다. 날카롭기도 하고 무뎌져 있기도 한 은 그를 혼란스럽게 한다. 튀어나온 배는 휘두를 때마다 영혼과 칼의 분리를 확인시킨다. 순간, 둥근달 같은 자신을 베고 싶은 그로테스크한 욕망을 느낀다. 그는 칼을 거두고, 보름달을 한참 노려보았다. 멈춰서 있던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더 이상 나의 이야기는 없다."

그의 말에 칼은 붉은 홍조를 띤다. 그들의 춤은 새벽까지 이어진다. 오직 달의 풍만함이 에로틱한 눈길로 들을 감싸 안는다.


그는 칼의 춤에 깊은 자상을 입은 을 바라본다. 날카롭게 잘려 뜨거운 내장을 쏟아낸 신체는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다. 애도의 춤사위는 피 같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그의 몸은 감당할 수 없는 열기로 활짝 열린다. 굳어버린 근육과 뻣뻣한 관절은 더 이상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다. 이름 없는 이에게 다시 한번, 희열의 언어로 쓸 것을 약속한다. 이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른 그는 묘비명을 쓴다. 황제의 연회도 고혹적인 무희도 그의 여정을 막을 수는 없다. 그의 칼은 벨 수 없는 것을 잘라냈다. 자유가 절뚝거리며 그를 뒤따라 온다.


'서사는 고통을 언어화하고 그녀의 몸을 하나의 무대로 바꾼다. 고통은 내밀함과 강렬함을 낳는다. 심지어 고통은 에로틱한 사건이기도 하다. 성스러운 에로틱함이 고통을 희열로 바꾼다.' -한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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