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없는 깃발
니체 읽기(9), 커다란 사건에 대하여, 9월 27일 단상
깃발의 그림자
독수리가 별을 물고 있는, 거대한 깃발이 높이 솟아있다.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나지막한 산을 그는 넘고 있다. 장검을 비스듬히 등에 맨 채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집집마다 걸린 붉은 깃발은 임박한 전쟁을 예고하고 있는 듯했다. 문득, 전장에서 본 거대한 깃발과 키 작은 이들을 떠올렸다. 그는 깃발의 그림자에 모인 난쟁이들의 격정적인 욕설과 모욕적 행동을 수도 없이 보았다.
막상 전투가 시작되면, 열정적으로 소리 지르던 이들은 달려가기를 주저했다. 뛰는 척하다, 게처럼 횡보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의 입과 내장은 복화술처럼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열기는 자신의 두려움의 크기와 다르지 않았다. 그는 으르렁대는 개의 허풍과 울부짖는 칼의 싱거움을 안다. 그는 신성한 얼굴을 한 천박한 기만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안다.
'너희들 모두는 무엇보다도 기꺼이 자유라고 울부짖는다. 그러나 요란한 울부짖음과 연기가 커다란 사건을 둘러싸자마자, 나는 커다란 사건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다.' -니체
그가 마을로 들어섰을 때 이상하리만큼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집의 문은 닫혀있고, 굴뚝으로 어떤 연기도 올라오지 않았다. 다만 멀리서 개가 울부짖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는데, 귀를 기울여보니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마을의 중앙 광장에는 붉은색 완장을 찬 이가 단상에 올라와 있었다. 남자는 요란하게 손짓을 하며 험악한 표정을 했다가 광장 중앙의 높은 깃발을 향해 신성한 표정으로 울부짖기도 했다. 그는 도저히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단상 아래 모인 이들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차라리 전복당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다시 생명을 얻고 그대들에게 덕이 다시 생겨나도록!' -니체
마을에 잠시 머무르려 했던 그는 마음을 바꿔 광장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단상의 남자가 소리쳤다.
"거리를 떠도는 검객이여, 방황을 멈추고 깃발 아래로 들어오라. 위대한 독수리단의 기사가 될 기회를 주겠노라"
그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거기 멈춰라, 이런 무례한 놈, 어서 멈추지 못할까! "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을 뿐이었다.
"여봐라 저놈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 금화를 주겠다"
군중은 검객에게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그들의 키보다 큰 장검을 차고 있는 그는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러자 단상 주변을 지키던 이들이 칼을 뽑아서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그만 검객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때 그는 걸음을 멈추고, 난쟁이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장검이 비스듬히 햇빛을 받아 순간 밝게 번쩍였다. 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속도를 줄이거나 옆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지그재그로 흩어지던 이들은 엉켜서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였다. 막상 그는 검을 뽑지도 않았다. 가만히 서서 그들의 나약함을, 허기진 속을, 억지로 구겨 넣은 두려움을 내려다보았다. 쓰러진 이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숨 죽인 채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듯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떤 깃발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는 걸었다.
정오의 태양이 그를 비추었다.
어떤 그림자도 없이, 그는 걸었다.
'내 말을 들어라, 지옥의 소음이라는 친구여! 커다란 사건, 그것은 우리들의 가장 요란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들의 가장 고요한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소음을 창안한 자들의 둘레가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창안한 자들의 둘레를 세계는 돌고 있다. 세계는 소리도 없이 돌고 있다.'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