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9일, 특별전이 종료되는 하루 전날. 더 미뤘다가는 이대로 샤갈을 떠나보내야 했기에 짬을 내어 Chagall and the Bible 전시회를 찾았다. 그림을 볼 줄 아는 것도 아닐뿐더러 샤갈에 정통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단지, 샤갈 특유의 따뜻함과 사랑스러운 화풍 속 난해하지 않은 상징과 유머를 좋아한다. 마음대로 해석하고 스토리를 상상하는 즐거움 – 모든 예술 향유에 허용되는 그것 –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 중 가장 오래 머물며 바라보았던 작품은 대형 태피스트리 작품인 <모세>이다. 처음엔 벽면 하나를 가득 채운 압도적인 크기에 넋을 잃고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것이 그림이 아니라 양모를 씨실과 날실로 직조해 만든 태피스트리라는 것에 놀라고, 그런데도 회화라고 착각할 만큼 섬세한 표현에 감탄한다.
작품 중앙엔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난 모세가 십계명을 들고 있다. 그의 품 안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이 있고, 그 아래는 허리를 뒤로 낭창하게 꺾은 채 곡선을 그리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있다. 이들은 모두 서커스가 열리는 무대 안에 있다. 말 위에 서서 재주를 부리거나 물구나무를 선 곡예사와 함께 모세도 예수도 춤을 추고 있는 듯하다.
샤갈이 어떤 의미로 이 작품을 만들었는지 분석은 하지 않기로 하자. 그것은 도슨트나 교수님이 이미 해 놓으셨으니.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그림을 보며 떠오른 나의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코로나 확진자 증가로 계속 온라인 수업을 하다 처음으로 등교 수업을 하게 된 22년 3월 중순의 어느 아침. 희고 마른 얼굴에 뿔테 안경을 쓴 아이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아이는 자기 책상에 가방을 휙 내던져 놓고는 친구에게로 달려가 흥분된 몸짓으로 말을 붙인다.
오호라, 네가 온라인 수업 때 자기 이름을 게임 캐릭터로 바꿔 놓고, 쉴 새 없이 카메라를 회전하던 그 녀석이로구나. 나한테 채팅으로 의미 없는 자음과 모음 테러를 날려놓고는 지금 시시덕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냐. 네가 등교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단단히 뿔이 났으며 너에게 온라인 수업 규칙을 상기시킬 것이다.
아이는 학교에 오자마자 담임의 잔소리 폭탄을 맞았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모깃 소리같이 뱉어내고서야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담임은 아직 속이 시원하지 않았지만 1, 2교시가 전담 수업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아이들에게 수업 채비를 시키고는 교실을 빠져나왔다.
1교시 영어 시간에 그 아이는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머리카락을 자꾸 헝클어뜨려서 영어 선생님께 혼이 났다. 그 후에 영어 프린트를 갈기갈기 찢어놓아 또 혼났다.
2교시 도덕 시간에는 연필을 쪼개서 연필심을 꺼냈다. 꺼낸 연필심을 똑똑 부러뜨린 다음 그것을 문지르며 그림을 그리다 혼났다고 한다. 교실 바닥은 부러진 연필심이 돌아다니며 그려놓은 자국이 한가득이었다.
3교시 수업 시작 전 내가 교실에 들어섰을 때는 그 아이 주변에 물이 흥건했다. 물병을 쏟은 것이다. 게다가 12색 색연필과 네임펜이 우르르 쏟아져 있고 쪼개진 연필과 칼로 난도질 된 지우개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나에게 몰려와 그간 있었던 아이의 행동을 앞다투어 이른다.
아, 나는 다시 뿔이 돋아난다.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진작에 불벼락을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성의 끈을 놓으면 안 된다고 자신을 진정시킨다. 여전히 연필심을 똑똑 부러뜨리고 있는 아이의 손목을 잡고 복도로 나간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더냐. 도대체 왜 그런 것이냐고 물어도 아이는 말을 하지 않는다. 눈빛에는 버티겠다는 장기전의 의지가 보인다. 오호라, 네가 그렇게 나온단 말이지.
“그래, 말을 하고 싶을 때 선생님께 얘기해 주렴. 대신에 이유를 말해야 수업에 참여할 수 있어.”
나는 교실로 들어와 망아지 같은 아이들을 집중시킨 후 수업을 시작했다. 4, 5교시는 국어 시간으로 높임말 표현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책상을 가장자리로 모두 밀어놓고 둥글게 앉았다. 노래를 부르며 공을 옆 사람에게 보내다가 교사가 신호를 줄 때 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황에 알맞은 높임 표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놀이를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더 신나게, 더 웃긴 표정을 지어가며 노래를 부른다. 누군가 벌칙을 받을 때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을 보고 있다는 듯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원 밖에 있는 네가 이 원 안으로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도록.
아이가 슬금슬금 나에게로 왔다. 그러고는 말하고 싶어졌다고 한다. 전담 시간 한 행동에 대해 이유를 물으니 ‘그냥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순간 이성의 끈이 뚝 끊어졌음을 느꼈다. 그렇지만 나는 애써 그 끈을 부여잡고 동여맨다. 우선 많이 혼나서 기분이 좋지 않았을 아이의 심정을 공감해 준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말한 것도 칭찬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는 지켜야 할 수업의 규칙을 상기시킨다. 아이는 다시 규칙을 잘 지키기로 약속한 후 원 안에 함께 앉았다.
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이 옆으로 가고, 또 옆으로 가서 그 아이에게 공이 왔다. 나는 이제껏 참여를 못 했던 그 아이를 배려하여 그 아이가 당첨되게 신호를 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아이는 내가 신호를 줌과 동시에 받은 공을 냅다 원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고 있다.
“공을 던지는 게 아니라 잡고서 말하는 거예요.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놀이에 참여할 수 없어요.”
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다. 공이 옆으로 가고, 또 옆으로 가서 그 아이에게 공이 왔다. 아이는 또다시 공을 냅다 밖으로 던져 버렸다.
우리 교실은 교무실 옆이다. 그것은 내가 이성을 잃지 않게 하는 큰 힘이 되곤 한다. 그러나 모세도 말을 듣지 않는 백성을 보고는 화가 치밀어 십계명을 패대기쳤다. 교감 선생님, 저는 모세처럼 성인군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당한 분노입니다!
“원 밖으로 나가!!!”
그러나 아이는 꿈쩍하지 않는다. 예상했던 바이다. 팔을 잡아당기면 팔이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이럴 때는 엉덩이로 버티는 아이의 등을 밀어야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작고 마른 열 살 아이는 어른의 힘을 이길 수 없다. 아이는 기를 쓰며 버텼지만 결국 속절없이 원 밖으로 밀려 나갔다.
“너는 이 놀이에 참여할 수 없어!”
아이를 뒷문에 두고 나는 다시 원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짝!”
아이가 자기 뺨을 때렸다.
“짝! 짝!”
연이어 두 번을 더 때렸다. 나는 달려가 아이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이는 왼손을 들어 자기 뺨을 사정없이 때리기 시작했다. 앉아 있던 다른 아이들도 깜짝 놀라 우르르 몰려와 그 아이를 말리기 시작했다. 때리려는 아이와 말리려는 아이들이 뒤엉켜 교실 바닥에 나뒹굴게 되었다. 그만하라며 소리치는 아이들, 잡힌 손을 기어코 빼내어 자기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아이.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내 마음이 이내 평온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이 근처에 오지 않도록 했다. 다른 아이들이 물러나자 그 녀석은 쉼 없이 자기 뺨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곧 점심시간이었으므로 나는 모두에게 손을 씻고 줄을 서도록 했다. 발열 체크를 하는 와중에도 아이는 계속 자기 뺨을 때렸다. 줄을 서서 급식실로 가는 복도에서도, 급식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줄을 서 있을 때도 아이는 뺨을 쉬지 않고 때렸다. 놀란 급식 도우미분들이 달려와 제지하려 하실 때 나는 그분들께 물러나시라고 했다. 아이는 아무도 말리지 않는 급식실에서 식판에 급식을 받을 때까지 웅성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뺨을 때렸다. 심지어 수저를 들고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은 후 씹을 때는 수저를 내려놓고 씹으면서 뺨을 때렸다.
그렇게 내버려 두었다. 사실 나는 무서웠다. 이래도 될까?하는 생각과 함께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도 뺨을 내리치는 소리에 온 신경을 쓴다. 뺨 때리는 빈도가 슬쩍 느슨해질 즈음 찰나를 놓치지 않고 아이에게 갔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냈다.
“밥을 좀 편히 먹지 그러니?”
“밥 안 먹고 싶어요.”
“그래, 그럼 그만 먹어라.”
아이는 먹던 식판을 정리하고는 잔반통으로 가 남은 음식을 버렸다. 그리고는 부르지도 않았는데 내 옆으로 왔다. 나는 옆에 앉으라고 했다. 나도 식사를 멈추고 식판을 정리했다.
우리는 함께 급식실을 나왔다. 나는 앞장서 걸었고 아이가 뒤따라왔다. 한창 벚꽃이 피어나고 있는 시기였다. 우리는 학교의 화단을 걸었다.
“벚꽃이 예쁘다. 아직 다 피지 않았지만 이 때도 예쁘지. 벚나무는 언제나 예뻐.
이건 산수유야. 우리 학교 나무 중 제일 먼저 꽃을 피웠어.
이건 목련이지. 처음엔 목련이 주먹을 쥐고 있었어. 지금은 가위를 하고 있지만 며칠 뒤에는 보자기처럼 활짝 필 거야.
이건 배롱나무야. 봄꽃이 지고 난 다음 나중에 빨간 꽃이 펴. 선생님은 우리 학교 나무 중에 배롱나무가 제일 좋아. 나무가 맨들맨들 메롱메롱하고 느낌이 좋거든. 만져볼래?”
아이와 나는 펜스를 건너 화단에 들어가 배롱나무를 만져보았다. 아이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배롱나무를 여러 번 쓰다듬었다.
“선생님, 나무도 아프면 피를 흘려요. 나는 빨간 피를 흘리는 나무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 나무도 아프면 피를 흘리는구나.”
“선생님, 제가 선물 줄까요?”
아이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쪽지를 꺼냈다. 펼쳐보니 연필로 정교하게 명암을 넣어 색칠한 게임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 눈을 들어 안경 너머 아이의 눈을 보았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눈 밑부터 볼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의 볼퉁이가 보인다. 심장이 욱신거렸다.
나는 샤갈의 모세 태피스트리 앞에서 그 아이를 생각하고 있다.
아이의 기이한 춤은 열 살 인생 내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힘겹게 버텼음을 방증하는 듯하다. 어린 네가 이 시대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