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시각으로도 촉감으로도 기억나지 않는
한때는 닳도록 만졌지만 이제는 그리움만 남은
아주 오래전 비디오와 책을 대여해서 보던 시대가 있었다. 분명 청동기 시대를 마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쯤까지였던 것 같은데 눈 한번 깜빡했더니 비디오 대여점은 비디오 CD, 블루레이를 거쳐 스트리밍으로 천하통일 되었면서 최후를 맞이했고 책 대여점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권당 1000원씩 받고 재고정리 후 순식간에 멸망해 버렸다.
그런 시대의 변화와 함께 많은 것들이 사라져 간 것은 무수한 자영업자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가게 하나하나마다 가지고 있던, 가게 입구에서 24시간 365일 반환의 손길을 기다리던 반납함은 이제 아무 곳에서도 볼 수 없다. 그나마 비슷한 모양은 가진 헌 옷 수거함이 동네 어딘가에서 간간이 보일 뿐 내가 기억하는 반납함은 무심히 지나다가 우연히 마주칠 뿐이다.
그렇게 우연히 마주친 반납함을 한번 만져봤더니 "나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외치는 것 같은 단단함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물론 ATM과 달리 비디오나 도서 반납함을 강제로 뜯어서 내용물을 가져갔다는 뉴스는 거의 보지 못했던 이유는 내용물이 복불복인 대여함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강철의 대여함은 페인트칠의 가호 속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대여함의 최대 강적은 범죄자들의 습격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였고 그 문제만큼은 강인함과 단단함으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내 삶에서 대여함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왕가위 감독의 2000년 작 '화양연화'에는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말로써 좋았던 그 무언가가 희미해졌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작은 탄식을 표현하고 있다. 한때는 매일 같이 학교를 마치고 들여서 신간 만화책을 빌려봤던 책 대여점, 매주 주말마다 새로 나온 비디오테이프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들렸던 비디오 대여점은 내 일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간신히 그리움만 기억하는 그 많은 대여점들, 그리고 다른 모든 추억들은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