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우리가 인문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
언젠가부터 인문학 열풍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모든 것이 더 급박하게 디지털화, 인공 지능화되고 있는데, 왜 아날로그의 대장격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은 지금과 같은 첨단과학의 시대에도 여전히, 아니 오히려 더 각광을 받고 있는 걸까요? 그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죠.
인문학(人文學)이란 사람(人)과 문화(文)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ㆍ탐구하는 학문으로,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와 인생의 기간 동안 수반되는 모든 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 프란체스크 페트라르카는 이런 인문학을 일컫어 “젊음을 유지하고 노후를 즐기며, 번영을 강화하며, 역경의 피난처가 되거나 위안을 제공받는 학문으로, 우리가 시골에 가거나 여행하는 밤에 함께하거나, 거친 세상의 방해를 받지 않고 집에서와 같이 편안한 즐거움을 주게 하는 학문”이라 멋지게 정의했죠.
탐 설리반(Tom Sullivan)이라는 미국의 시각장애인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절망과 자괴감에 빠져 있던 자신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말은 딱 세 단어였다고 말합니다. 어렸을 때 항상 외톨이로 지내던 그에게 어느 날 옆집 아이가 건넨 말, 그것은 바로 “같이 놀래?(Want to Play?)”였습니다. 만약 그 아이가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2009년 암으로 안타깝게 우리의 곁을 떠난 장영희 교수, 그녀는 저서 <문학의 숲을 거닐다>에서 모든 인문학의 기본 주제는 “같이 놀래?”일지도 모른다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형형색색으로 다르게 생긴 수십억의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고 자리싸움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적 보편성을 찾아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화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가를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라는 겁니다.
노자 인문학으로 유명한 최진석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에서 우리가 인문학을 배우려는 이유는 인문적 활동을 할 수 있는 힘, 즉 인문적 통찰을 기르기 위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인문적 통찰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문학적 통찰은 뭐냐? 바로 ‘죽음’이라는 개념에 익숙해 있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일’이 “툭!”하고 경험되는 거예요. 죽음이라는 명사가 갑자기 동사가 되어 자기에게 파고드는 사건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명사로 굳어진 사람이 동사적 율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주체력을 회복하는 일이자 덕의 힘을 갖는 일입니다.
그는 말하길, 인문적 통찰은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인문학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버릇없어 지기 위한 것으로 익숙한 것, 당연한 것, 정해진 것들에 한번 고개를 쳐들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죠. 그 한 가지 예로써 타조 사냥 이야기를 들고 있는데, 타조들은 오랜 시간 사냥꾼에 쫓기다 보면 결국 긴장감을 못 이긴 채 결국 고개를 처박고 만다고 합니다. 하지만 혹여라도 인문학을 공부한 타조가 있다고 한다면, 그 타조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에잇, 이왕 죽을 거 날 쫓던 놈들이 누군지나 보고 죽자!’고요. 그와 동시에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뒤를 홱 돌아볼 경우, 예기치 못한 타조의 행동에 놀란 사냥꾼들이 혼비백산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처럼 인문학의 기본적 출발은 ‘생각’ 즉, 낯섬에 대한 도전, 당연함에 대한 거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죠.
또한 인문적 통찰은 ‘생각’에서 시작되어 그것이 깊어지고 구체화되며, 실행됨으로써 얻어지게 됩니다. ‘죽음’을 예로 들자면, ‘죽음’이란 형태가 없는 개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자신과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실제로 경험하게 된다면, 죽음은 개념의 단계에서 실재의 단계로 내려서게 된다는 겁니다. 객관적 3자인 관객의 위치에서 주관적 실체로 무대에 등장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알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문적 통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문학 공부를 통해 인문적 통찰을 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시 최진석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죠.
우리가 인문적 통찰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지점은 어디냐? 행복입니다! 갈등 속에 휩싸이지 않게 해줍니다. 더욱 아량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생명력이 넘치게 해줍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도록 인도해 줍니다.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넘치게 해줍니다. 이념과 가치관과 신념의 체계를 벗어던지고 인문적 통찰의 길로 진입하는 순간 오로지 자기만 우뚝 서 있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인문적 통찰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행복! 행복해지기 위해서라 강조합니다. 그는 행복이란 자기 자신이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란 무엇일까요?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 상상력이나 창의성이 넘치는 것, 자기만 우뚝 서 있는 경험을 하는 것 등, 한마디로 행복이란 자신의 순수한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인문학 공부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순수한 욕망을 발견하기 위함이며, 그 잠재적 욕망을 외부로 꺼내어 그 욕망이 바라는 바대로, 진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곧 행복일 테니까요.
이처럼 인문학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배워야만 할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다 할지라도, 경영적으로 성공을 한다 할지라도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반대로 부자가 아닐지라도, 성공을 하지 못했을 지라도 행복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행복은 어떤 행위에 대한 결과물이나 성과물이 아닌, 감정의 형성체라 할 수 있으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조정 또는 조절할 수 있다면 충분히 행복의 감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앞에서 최경자, 즉 ‘최소한의 경제적 자유’와 최경성, ‘최소한의 경영적 성공’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가지의 공통점은 ‘최소한’입니다. 그 기준치를 낮출 때 오히려 경제적 자유와 경영적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마지막 한 가지, 인문에 대해서는 반대로 최인복, 즉 ‘최대한의 인문적 행복’을 강조하려 합니다. 행복은 눈에 보이지도 않으며, 돈에 의해 거의 좌우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스스로 행복을 얻고 느끼려 하는 자신의 의지와 배움,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과 훈련, 실행만 있다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문학을 통해 얻어야 할 그리고 찾아야 할 행복은 ‘최대한’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최인복, ‘최대한의 인문적 행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화와 12화에서는 보다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 ‘행복 발견법’과 ‘행복 강화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표지 이미지 출처 : <아이처럼 행복하라>, 알렉스 킴 지음)
(11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