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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에 늦은 깨달음

<작은 땅의 야수들> 읽은 후

by baraem

소설《작은 땅의 야수들》을 읽으며 떠오른 기억 하나.



그들을 읽으며 십여 년 전, 물리치료사로 일했던 날이 생각났다.

주 2회, 오전 10시쯤 치료를 받으러 오시던 어르신 한 분이 있었다.



어르신은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다.
대접받지 못한다고 느끼실 때면 언성을 높이셨다.

그분이 오시는 시간대는 늘 대기가 길었다.
그래서 그분의 비위를 매번 맞춰드리기란 쉽지 않았다.



어르신의 오른쪽 어깨엔 큼직한 흉터가 있었다.
어르신은 늘 같은 이야기를 꺼내셨다.


"이 상처가 뭔 줄 알아?
6.25 때 생긴 거야.
요즘 사람들은 이런 얘기 듣기도 싫어하지…"



길었을 서사를
짧은 시간 안에 쏟아내려다 보니

어르신은 늘
머리와 꼬리만 급히 이으셨다.



몸통에 해당하는 긴 이야기는
끝내 꺼내지 못하셨다.



그때의 나는 바빴다.
늘 같은 말을 반복하시는 어르신이
어느 날은 지겹고

어떤 날은 짜증 났다.



그분의 '몸통 같은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지고
또 죄송스러운 마음이 든 건
두 아이를 키우며 역사를 다시 접하고
역사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가
비단 만들어낸 가상이 아니라는 걸
제대로 깨닫게 되면서였다.



왜 깨달음이라는 건
이렇게 약속에 늦는 걸까.



신뢰할 수 없는 친구처럼.
그래서 더 귀한 걸까.

그랬다면,

그때 나는 어르신께
감사하다고
인사할 수 있었을 텐데.



상상할 수 없는 시대의 아픔 속에서

사람들은 죽고, 살고, 찢겨나갔을 것이다.

그 안에 사랑도 있었을 테고
그립고, 후회될 순간들도 있었을 터.



배곯지 않으려 치열하게 살아낸
작은 땅의 야수들.


사는 내내는 아니지만

사는 틈틈이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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