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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Aug 07. 2023

털 없는 원숭이와 삶의 목표

삶의 목표란 무엇인가?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답은 무엇일까?

삶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나보다 더 잘 사는 사람, 삶에 대한 주변의 조언, 반복되는 일상의 지루함, 실패, 거절 등을 마주하게 되면 마음속에 그려놓았던 이상적인 삶과 보잘것없는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이 좇고 있는 것이 잘못되었기에 삶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지금까지는 이러한 의문에 대응하고자 열심히 더 나은 목표를 찾아왔다.

삶의 새로운 기준을 세우고 그것이 삶을 이상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패와 괴리, 의문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실패와 성공을 반복하며 공부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 일을 반복했지만 제대로 된 답을 찾지는 못했다는 느낌만이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이상 따위는 실현시킬 수 없다는 차가운 이성의 속삭임만이 점점 더 뚜렷해져 간다.     


그렇다면 접근법을 조금 바꿔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이든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한 사람에게 이입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조금 더 우리 안에서 우리에게 삶에 관한 의문을 건네는 우리의 일부에게 이입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생각, 의식 혹은 이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보통 우리의 내부 다른 세포뭉치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않는다.

꼬르륵 거리는 배가 아픈 것인지 음식을 요구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려워하고 기분 나쁜 느낌이 왜 발생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 의식은 접근할 수 있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식사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정보를 의식하며 이번 꼬르륵 소리는 배가 고프다는 신호라는 결론을 내린다.

마찬가지로 삶에 관한 큰 만족감이나 깨달음이 느껴졌던 경험을 의식하며 얼핏 느껴지는 삶에 관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다.

알쏭달쏭 하지만 큰 울림을 준 학자의 명언, 삶에 관한 깨달음이 녹아든 것처럼 보이는 예술작품, 삶이 만족스러워 보였던 성공한 사람의 인터뷰, 진리를 품은 것만 같은 연구 결과, 거대한 평안함과 행복을 느꼈던 경험 등을 참고해서 나름의 목표를 찾게 된다.

나름 최선의 노력을 하지만 정작 그 노력 대부분은 삶에 관한 의문을 만들고 해소할 수 있는 뇌 안 그리고 의식 밖에 있는 이들을 제대로 고려하고 있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의문은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다.

하지만 꼬르륵 소리의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주는 영향과 삶에 관한 의문의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주는 영향은 전혀 다르다.

때문에 우리는 제대로 된 답을 찾고자 지금까지 접근하지 못했던, 삶에 관한 의문의 출제자와 정답 검토자에 대해서 알아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대부분의 정보가 오고 가는 뇌가 세포 덩어리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삶에 관한 고민과 고민의 해소까지의 복잡한 과정은 뇌 속 온갖 세포가 참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단 하나의 질문과 단 한 번의 대답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삶에 관한 고민은 다양한 세포 뭉치의 복합적인 요구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 

그들은 어쨌든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여겨지는 또 다른 세포 뭉치들, 즉 나라는 존재가 생존하고 번영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우리는 커다란 세포 덩어리가 되어서 삶을 누리고 싶다는 두 가지 강력한 의지의 충돌로부터 태어났다.

두 생식 세포의 분화를 통해 만들어진 다른 세포들 역시 그 의지를 이어받아서 거대한 세포 뭉치가 된 ‘나’를 너무나 소중히 여긴다.

때문에 늘 내가 살아남고 번영하길 바란다.

그러한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험과 보상의 예측이다.

위험을 잘 예상해서 회피하고 보상을 잘 예상해서 획득해야 생존을 이어나가고 번영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단발적인 예측을 반복하는 것으로는 더 잘 살아갈 수 없다. 

한 번의 예측으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획득하고 그것을 다음 예측에 반영할 수 있어야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다.

때문에 예측은 학습을 불러오며 점점 일정한 경향을 갖거나 정교해져 간다.

위험과 보상에 관한 신호를 느낌의 형태로 만들어주는 세포 뭉치와 그 신호를 인지하고 조절하는 세포 뭉치가 이 과정에 참여하곤 하는데 그 둘의 만남이 가끔 의식된다.

위험과 보상에 관한 느낌과 그 느낌을 조절하고 해소하기 위해 계획을 만들어야 한다는 느낌이 의식되고 그 결과, 우리 의식은 삶의 목표를 찾게 된다.     


삶에 관한 의문은 결국 우리 안에서 생기는 예측과 학습 과정에서 생겨난다.

위험과 보상을 예측하고 그것을 해소하도록 주장하는 자, 다양한 정보를 종합해 구체적인 계획을 만드는 자 등이 참여해 그들의 복합적인 요구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이러한 요구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따라서 삶에 관한 의문의 원인이 되는 느낌은 단 한 번의 성취로 해소되지 않는다.

삶의 목표는 무언가 대단한 단 하나의 목표를 성취한다고 이룰 수 없다.

살아가면서 계속, 특정 요구에 관한 단기적인 대응을 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또 삶의 관한 의문은 서로 다른 정보를 생성하는 다양한 뇌 세포 뭉치가 참여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장 강렬한 느낌인 불안과 행복에만 충실한 것이 완벽한 답이 될 수는 없다.

위험을 피하고 보상을 획득하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정교한 계획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 중간 계획을 위해 또 다른 예측과 평가 과정이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을 통해 얻은 정보는 이전에 만들어진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을 수정할만한 힘을 갖는다.

즉 중간 계획을 잘 통제하지 못한 결과 예측했던 만큼의 평안함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삶에 관한 의문을 제대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핵심이 되는 위험과 보상에 관한 신호에만 대처할 것이 아니라 중간 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세포 뭉치의 요구도 귀 기울여 줘야 한다.

궁극적인 목표를 향하는 길을 더 정교하게 가꾸고자 노력하고 다양한 요구를 하는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도 단순히 행복하고 평안하다는 감각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 삶이 통제되고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줄 수 있어야 한다.

또 실제로 행복과 불안, 두 감정의 요구에만 충실한 것은 우리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어줄 수 없기도 하다.

우리를 둘러싼 온갖 변수들이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의 실현을 방해하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예측 실패를 마주하게 된다.

만약 예측 성공을 한다고 해도 그 이후 예상치 못한 일이 추가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 성공만이 감정을 해소하고 삶에 관한 의문을 해소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긴다면 결국 반복되는 실패를 마주하며 삶이 통제되지 않다고 결론짓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누가 만들었는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만들었는지 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의 핵심은 분명 위험을 회피하고 보상을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과 보상을 예측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과정은 매우 복잡한 계산을 필요로 하고 그만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와 그들의 복잡한 요구가 생겨난다.

따라서 위험을 피하고 보상을 획득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중간 과정에 기여하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에게 그들의 기여가 잘 기능하고 있다고 설득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간 과정에 관한 통제감 혹은 삶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 어렵지만, 매번 예측한 결과를 완벽히 실현시키는 것에 비해서는 쉽다.

우리는 위험에 대비하기 위한 선택과 위험을 마주하고 나서의 대처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감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이 직접 보상을 발굴해 냈다는 감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삶에 관한 통제감을 형성할 수 있다.

또 가장 강력한 보상이자 위험이 될 타인과의 교류에서 위험보다는 보상을 발견할 방법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보상과 위험을 향하는 길을 통제해 낼 수 있다는 감각을 만들어 생존을 향한 예측과정에 참여하는 다양한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다.

게다가 과정에 대한 통제감은 다음 예측 신호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결국 궁극적인 목표인, 위험 혹은 보상에 관한 신호를 만들어내는 이들까지 진정시킬 힘을 갖는다.

위험을 다스릴 자율성과 자기 효능감을 형성해 보거나 그리고 보상을 직접 찾아내거나 형성해 본 경험은 더 이상 우리가 눈앞에 보상과 위험에 쩔쩔매지 않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의식 역시 통제감, 대리감을 갈구하기 때문에 혹은 통제감을 원하는 뇌 세포 뭉치의 협업이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어쨌든 이 모든 과정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의식을 위해서라도 통제감을 찾아갈 필요가 있다. 


모든 생명체는 나약하게 태어나서 점점 살아가기 위한 힘을 키워간다.

힘을 키우고 그 힘으로 다시 다음 힘을 얻는 곳까지 나아가는 일을 반복한다.

그것이 쌓여 삶이 된다.

근데 한 종은 삶을 다른 식으로 바라봤다.

삶을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향할 길을 찾고 그 의미가 주는 기대감만을 살아가는 힘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또 자신의 종만이 이렇게 삶에 관한 특별한 견해를 갖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해질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들은 오랫동안 삶을 뛰어넘는다는 그 의미를 찾아내지 못했다.

또 그들이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공식을 무시해도 될 만큼 강인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그들이 우습게 본 살아가는 방식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결국 처음부터 접근방식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만한 이상과 반복된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털 없는 원숭이는 자신이 만든 오래된 견해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삶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다는 감각을 얻고 그 힘을 통해 다음 목표로 나아가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방식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회귀가 꼭 우리의 특별함을 훼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살아갈 힘을 찾아내기 위해 우리가 갖고 있는 특별함을 활용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과 동족의 마음을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능력과 그 능력이 쌓아놓은 지식을 통해서 살아갈 힘을 만들어내는, 충분히 유별난 존재이다.

주어진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일이 무엇보다 어렵기에 삶의 목표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반복해서 삶을 이끌어나갈 힘을 획득하는 것이 된다.

우리만의 능력으로 직접 살아갈 힘을 만들고 그 힘을 통해 다시 살아가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 삶이 된다.


여기까지 왔으니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크 다라본트, 스티븐 킹. 1994.) 




참조

프랭크 다라본트, 스티븐 킹. 1994. 쇼생크 탈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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