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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Jan 15. 2022

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제국주의론] 외

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제국주의론] / [국가와 혁명] 외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변증법의 '본질'이다... 과학사를 통해 분명히 검증...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화학에서는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란 자연(여기에서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 레닌, [철학노트], <6장.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4.




1.


-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20대 내내 여차하면 내가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혼자 잘근잘근 씹던 말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거나, 나보다 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줄곧 혼자 내뱉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심 '보수'였다.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에서 김일성이 제일 싫었고, 사립대학 병설 사립중고등학교인 모교에서 알려준 대로 '전교조' 선생님들도 싫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패는데 비범한 기술과 특별한 조예를 갖춘 선생들은 어째 모두 '전교조' 가입했다는 소문이 몇년간 횡행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이었던 정치경제 선생님은 다행히 제자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또라이'로 소문났다. 아마도 그 선생님도 '전교조'였을 것 같았는데, 사립고등학교의 그 어떤 교사도 '전교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교조'는 말없이 음험한 소문으로 퍼지던 '학교괴담'과도 같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때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였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나는, 2차대전의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킹타이거(티거)나 야크트판더 전차와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전함, 융커스 폭격기 및 메서슈미트 전투기 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친일파'는 싫었던지 일본군국주의 전투기와 전함은 숨어서 좋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딱 '수구꼴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아직 애기였으므로 다행히 아직 '정치'에 관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오락실이나 학교운동장에서 보냈다.


스무살이 되어 대학 오리엔테이션 참가하는 버스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알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상에는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얘기하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아무튼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고만고만한 동네친구들만 득시글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스무살의 세상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재수생과 삼수생, 군대까지 다녀온 형들도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로 가끔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왠지 다들 부잣집 자제들 같아서 가난했던 나는 겉으로는 결코 아닌척 했지만 속으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우리집을 보고 친구 아닌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대진 않을까 찜찜해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 가서 주눅들지 말라고 만원짜리 몇 장을 자주 쥐어주시던 가난했지만 통큰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네가 아닌 학교 앞에 가면 적어도 나와 대학 사람들은 모든게 '동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영어만은 1%였다. 나는 '영문과' 말고 다른 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하면서 내 인생에도 '법대'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싶기도 했고, 마흔이 넘어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라는 깨달음에 왜 '사학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내 지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난 역시 똑같이 살았을 거라는 거다. 다시 돌아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문학'은 아직 잘 몰랐고, 1993년 2월의 대학 오리엔테이션 버스 안에서 만난 같은과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잘나 보였다. 충남 태안에서 온 공부 잘해 보이는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배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딱 서울 뺀질이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생긴 데다가 말도 품위있게 잘했다. 경남 마산 출신 친구는 얼굴이 철면피 자체로 워낙 여기저기로 나대는 바람에 '정박아'라는 별명을 바로 득템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출신임에도 시골 어디서 왔느냐, 삼수생이냐 초면에 숱한 질문을 받던 나 또한 동기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었지만 내세울 게 없어 최신곡 랩이었던 김건모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전날 내내 외워서 자기소개 시간에 불렀다. 관광버스 앞뒤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읊은 그 노래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이후 일년 내내 술집과 엠티 등지에서 나는 그 노래를 줄창 불러댔다.

나의 궁핍함과 열등감은 가수 김건모가 대충 상쇄시켜주었지만,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자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기자를 꿈꾸고자 했다. 영자신문사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 첫 신고식에서 신문사의 전통과 같았던 학군단 선배들이 시키는 말도 안되는 행태에 기겁을 한 나는 바로 영자신문사를 때려치웠다. '수구꼴통' 기질에 지금으로 치면 '일베' 끼가 다분하던 내가 보기에도 영자신문사의 쓰질데기 없는 역사와 전통은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난 '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영자신문사의 전통이 너무도 비루해 보였다. 저렇게 영어공부나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어봐야 뭐하나 싶었고 학과의 선배들과 잘나보이던 자유로운 영혼의 동기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91, 92학번 선배들의 후배 '의식화'가 꽤 성공적이었던지 파시즘을 동경하던 '수구꼴통'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빌어먹을 영자신문사 덕분에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신고식 며칠 후 사직서를 내는 나에게 이렇게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던 영자신문사의 편집장의 말과 반대로 난 그 신문사 일을 계속 했으면 두고두고 더 크게 실망했을 거였다.


문과대로 다시 돌아온 탕아인 나를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반겨주었고, 난 다시 술집과 과 학생회 행사에서 소주병에 꽂은 숟가락을 김건모 마이크처럼 잡고 "쓸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를 불러 제꼈다.

다들 반갑고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집도 부자인 친구들에게 가진 모종의 열등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해졌는데 나를 버티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말이 이 말이었던 거다.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이니까', 라는.




2.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 공부는 안 했고, 영자신문사를 초단기간에 때려치우면서 신문기자의 꿈은 바로 접었다. 나는 영문과 내 철학학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함께 읽었고 숱하게 데모대 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전경한테 두들겨 맞고 달려갈까봐 무서워 제일 먼저 내빼기 일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 덕분에 어느새 '노동자의 아들'에서 '노동계급의 아들'로 진화한 나는 아쉽게도 투쟁의 최전선에 파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사'는 못 되었다. 똑똑하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닌 나는 '전투력' 조차도 없어 술만 마시다가 돈도 없으니 친구 자취방 앞 골목에서 새벽 깡술을 마셨다. 그때 당시 하늘과 같던 87학번 선배가 지나던 길에 '정박아', '지진아', '벅스터(내가 벅스터다)' 우리 셋의 깡술판에 앉아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뭐냐 물었고 횡설수설하는 우리 삼인방에게 경주 출신의 그 선배는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는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면서 "공부 쫌 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멋졌다.

그 순간 '나도 공부 쫌 해서 저런 선배가 되자'고 나는 내심 결심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선생의 우정이 깃든 글들을 읽어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군에서 제대한 199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저작들은 대부분 1993년에 읽었다. 이제 '공부 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했다. '철학'이나 붙잡고 아는 척이나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실천'을 할 것인가.

그렇게 1994년의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다. 나보다 말도 잘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정박아'는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고 다녔지만, 혼자 틀어박혀 자습을 했던 나는 1908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불꽃(이스크라)' 같은 혁명가의 지하조직과 실천을 불같이 토했지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싸운 유물론자 엥겔스의 전통에 따라 당대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로 대표되는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에서 보면 20세기 초 레닌의 교조적 유물론보다 마흐의 '경험비판론'이 더 설득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오스트리아 '경험비판론'은 지금이 아닌 20세기 초의 이론이었고 당시 다수 노동계급이 상속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반박되어야 했다. 레닌은 선학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이비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 씨를 신랄하게 까댄 [반뒤링론]의 전통을 이으며 '경험비판론'의 사이비 과학주의를 거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2단계 혁명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1단계를 우선 거쳐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레닌은 역시 '반동'으로 몰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부터 노동자-농민 독재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투쟁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전통을 잇는다. 즉 부르주아지는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여 집권하지만 이내 다수 노동계급을 배신하는 '반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므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다수의 독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광범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1920년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나 1940년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론]과도 맞닿는 면이 있지만, 20세기 벽두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레닌의 시간은 '폭력'에 의한 즉각적 혁명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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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러시아 레닌주의와 서유럽 카우츠키의 논쟁을 읽어야 할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칼 카우츠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 '교황'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99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대중투쟁과 의회전술이 결합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단순한 전술이나 운영원리가 아니라 운동의 중심이 된 이후에야 나는 카우츠키를 읽었다. 1994년의 내게 카우츠키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자' 또는 '배교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에 안중에 없었는데, 이후에 보니 지금의 진보정당 노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카우츠키의 강령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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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우츠키는 투사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는 엥겔스의 '제2인터내셔널' 교리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관계의 사유화의 모순에 의해 생산양식이 사회화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자연이행된다는 매우 낙관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실현되던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가능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러시아 차르의 압제 아래 살아온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할 방법도, 가능성도 없었으니 민주주의를 보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카우츠키에게 보통선거로 노동계급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였다면, 레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한 계급의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였다. 따라서 부르주아 독재정권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94년 레닌을 읽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독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적합한 권력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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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국가론'과 '혁명론'은 불가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레닌을 읽는 이유는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1916~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종착점이었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말이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구축된 국가기구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수대중 독재에 의해 다시 건설되는 것. 이것이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미완의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실제로 레닌은 마지막 장을 쓰기 전에 "난 이제 그만 펜을 놓고는 총들고 혁명하러 나간다~"며 책을 마치고 있다. 매우 불온하고 위험했지만 '노동계급의 아들'인 스물한살의 나에게 이만한 매력적이고 고마운 인물과 사상이 있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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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3.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레닌, [철학노트], 1914.



1995년 10월에 군대 가기 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을 때 나와 놀아주는 선후배나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입대 전까지 나는 아마도 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실천론], [지구전론]과 [신민주주의론]을 읽었지만 그 속에 온통 레닌 뿐이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1917년 러시아 억압 문명에서 레닌주의로 실현되었고 1949년 중국의 유교 문명에서 마오쩌뚱주의로 실현되었기에 내 사상의 경로는 마오주의로까지 가야했지만 사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하고 실천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레닌에서 멈췄다. 더구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주체사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성론'이니 '품성론' 따위를 거론하며 주석을 옹립하고 세습시키는 북조선은 애초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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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오주의까지 가지 못하고 1995년까지도 레닌에 머물렀던 건, 그의 [철학노트]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목전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앞세웠던 '배신자' 카우츠키의 후예들 대부분이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국수주의(쇼비니즘) 제국전쟁을 옹호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그랬듯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으로 의회에 들어간 진보정당 의원들 중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소수였다. 카우츠키도 전시공채 법안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당을 이끌었지만 법안에 찬성한 다수 사회민주당 의회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 후예들이었다.

1914년의 레닌은 이들 모두가 [자본론]을 오독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그 거대 관념론 체계 속에서 '유물론' 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다. 변증법적으로 전도되는 그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철학노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14년의 암울한 제국주의 전쟁의 세계 정세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심장 런던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물론 헤겔 철학을 다시 읽으며 '유물론'을 재정립하고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의 칼날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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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론]을 썼는데 사실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두뇌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을 따른 것이지만 레닌 특유의 신랄함과 이론적 단순화의 미학을 담고 있어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레닌의 저작이다.



한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소비에트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서라 집권세력의 변명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은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책을 들고 다녔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혁명가 레닌의 1914년 [철학노트]에서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레닌의 [철학노트]는 정식 출간을 위한 저작이 아니라 자습을 위한 학습노트였고 나는 '혁명가'로서의 레닌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레닌을 읽었다.

잠시의 공백 후 1998년 내게 알튀세르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읽든 내게는 언제나 레닌이 보였다.


레닌을 읽던 시간,

1993년부터 1995년 10월까지의 이야기다.



***


1.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3.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동녘>

4.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5.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6. [국가와 혁명](1917),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7.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4), 레닌,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8. [민주주의와 독재](1976),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9. [에르푸르트 강령](1891), 칼 카우츠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10.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11. [지구전론/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1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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