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설'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가설'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 [인류의 진화], 이상희, 2023.
과학은 '가설(假說)'로부터 시작한다.
연역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과학'은 일차적으로 자료조사를 통해 어떤 대상을 설명하는 명제를 구성한다. 이 명제가 '가설'로 상정되어 본격적인 조사와 발굴, 비교검토를 통해 이 주장을 검증한다. 반증이 없다면 이 '가설'은 현재의 증거들을 통해 하나의 과학적 '사실'로 확정된다.
그러나 다른 과학적 성과가 새롭게 이뤄지면 이 오래된 '진리'는 깨진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 진리'는 모두 '상대적 진리'다.
'가설'은 깨질 수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절대적 진리'다.
레닌은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에서도 이러한 '진리의 상대성'이라는 '절대적 진리'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가설'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계단(사다리)이 아닌 나뭇가지(덤불)처럼 뻗어나가는 모습이 20세기 후반에 자리잡은 인류의 진화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작은 물줄기에서 큰 물줄기로 모여 지구 전체를 덮고 있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다양한 집단의 다양한 기원이 만들어낸 모습입니다."
- [인류의 진화], <들어가며 : 흐르는 강물처럼>, 이상희, 2023.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대학교 인류학과 이상희 교수는 2018년 한마음평화연구재단으로부터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를 연구해보라는 제안을 받고 2023년 [인류의 진화]라는 책을 출간했다.
호모 사피엔스로 분류되는 현생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고인류학계의 유럽식 주류에서 탈피해 연구를 아시아로 확장하는 시도 중 하나다.
다른 말로는 유럽이 발상지인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의 관계에 관한 고인류학계의 오래된 '가설'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이상희 교수의 [인류의 진화]를 읽기 전,
일반인 독자들은 우선 기본 '가설'부터 깰 준비를 해야 한다.
인류 진화를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인 나 같은 사람이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한 '가설'이 있다.
대략 600만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등장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300만년 정도 아프리카 초원지대에서 살다가 200만년 전에는 '직립보행'을 하면서 유럽으로 이동했다.
100만년 전에는 석기로 대표되는 '도구 사용'의 '호모 하빌리스'가 등장하고, 그 즈음 '불'을 발견한 고인류는 70만년 전에는 '의무 직립보행'의 '호모 에렉투스'로 진화하면서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다.
40만년 전 쯤 되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고 10만년 전부터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되어 거의 그대로 현생인류로 이어져 왔다.
'계단'이나 '사다리'처럼 한 줄로 이어지는 인류 진화의 '가설'인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오스트랄로 피테쿠스(600만년 전) - 호모 하빌리스(100만년 전) - 호모 에렉투스(70만년 전) - 네안데르탈인(40~20만년 전) - 호모 사피엔스(15~10만년 전)
2. 구석기 시대 및 수렵채집사회(200~3만년 전) - 신석기 시대 및 농경정착사회(1만년 전)
3. 플라이스토세(5~1만년 전 대빙하기) - 홀로세(1만년 전~현재까지 간빙기) 등.
일반인들이 대중적으로 공개된 유물조사 결과를 통해 이해한 '가설'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이 도식화된 '가설'은 얽히고 설킨다.
"고인류학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사람이 다른 동물에 비해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를 밝혀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 [인류의 진화], <1장. 네 이름은 호미닌>, 이상희, 2023.
이와 같은 '가설'의 주요 배경은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한 '사람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고인류학의 대전제였다. '창조론'이 사람은 원래부터 이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반증을 하지 못하는 한 '인류 진화'의 '잠정적 가설'은 '상대적'일지라도 아직 '진리'다.
'진화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이라고 논증한 미국의 고인류학자 도널드 프로세로에 의하면, 진화는 '잠정적 가설'이기도 하지만 현재도 진행되는 '사실'이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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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희 교수에게도 고인류학의 역사는 인류도 특별하지 않게 진화해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이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이냐 아니냐의 논란은 더 이상 의미없는 질문인지도 모릅니다. 21세기에 밝혀진 팩트는 우리 안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네안데르탈인은 지극히 '사람다운' 고인류종이었습니다."
- [인류의 진화], <12장. 또! 네안데르탈인>, 이상희, 2023.
고인류학의 과학에서도 '가설'은 계속 깨진다.
원래 제2차 대전 이전까지는 인류 기원이 동아프리카가 아닌 아시아였다.
호모 에렉투스로 분류되던 인도네시아 '자바원인'과 중국 북경의 '베이징 원인'이 한때 인류의 '기원'으로 여겨졌다.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는 인류와는 다른 존재였다.
그러던 중 유럽 고인류학계에서 '네인데르탈인' 유물에 대한 조사연구가 발전했다.
1960년대 즈음에는 그 동안의 유물조사 결과를 토대로 아프리카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가 유럽에서 네인데르탈인이 되었고 이후 크로마뇽인이라는 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했다는 '가설'이 우세하면서 인류의 '기원'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로 옮겨진다.
'가설'은 또 다시 깨진다.
1990년대에는 '네안데르탈인'이 현생 인류에게 유전적 영향을 남기지 않았다는 유물연구가 진전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은 '호모 사피엔스'와 다른 종이라는 주장이 '가설'이 된다. 유발 하라리가 [사피엔스]에서 '호모 사피엔스'를 '네안데르탈인'을 비롯하여 다른 종들을 멸종시킨 '학살자'로 규정한 주요 근거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는 '가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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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21세기가 되어 유전자 연구가 발전하면서 현생 인류 유전자 중 1~4퍼센트 정도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이종교배설이 등장한다.
즉, 교배를 통해 후손을 생식하는 것이 동종 뿐만 아니라 다른 종끼리 가능하다는 '가설'로 인해 '네안데르탈인'이 다시금 인류의 '조상' 범위에 들어오게 된다.
20세기 초에 '필트다운인'이라는 조작된 인류 '조상' 유물까지 내세우며 유럽인의 인류기원설을 주장하려던 유럽식 고인류학계에 또 다시 '네안데르탈인'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고인류학이라는 과학의 '가설' 또한 여지없이 깨질 수 있다고 논증하는 이상희 교수가 이 책 [인류의 진화]를 통해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학을 재조명하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부제가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인류)가 되어온 여정'인 이 책 [인류의 진화]의 목적 중 하나가 유럽 주류 '네안데르탈인 불패의 신화'(같은책, <나가며>)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가설'은 깨졌다가 다시 '불패의 신화'로 되살아날 수도 있지만, 예전과 같을 수는 없다.
과학적 성과는 무한하게 진보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네안데르탈인'이 인류의 조상으로 다시금 부활한들, 예전처럼 '사피엔스'의 전단계가 아니라 우리 안의 소량의 유전자로 부활한다.
이 '불패의 신화'는 옛날처럼 배타적일 수 없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유전자를 남긴 종이 유럽의 '네안데르탈인'(40~20만년 전) 뿐만 아니라 더 오래전 아시아 알타이 산맥의 '데니소바인'(80만년 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마저 발굴되지 못한 다른 종들도 있을 수 있다.
'가설'이 깨진 자리에 다시 부활한 '가설'이 예전의 그 '가설'일 수는 없는 것이다.
"... 우리는 지난 17세기부터 동의한 '종(種)'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다양한 '종'이 섞여 하나의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관점은 하나의 '종'에서 두 '종'으로 분화해야만 새로운 '종'의 탄생으로 인정한다는 입장에 전면적으로 도전합니다. 20세기의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이 21세기에서는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 [인류의 진화], <14장. 사피엔스의 기원>, 이상희, 2023.
인류의 '기원'이나 '종(種)'의 개념도 필연적으로 깨질 운명의 '과학적 가설'처럼 다시금 재정립된다.
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고인류학을 조명한다는 말이 아프리카와 유럽의 고인류학을 대체한다는 것일 수는 없다.
인류의 '기원'이나 '조상'으로서의 아직 미지의 수많은 종들이 지구의 기후환경 변화에 따라 각지로 퍼지는 과정에 대한 확장된 연구인 것이다.
아시아는 추위를 피하고 대형사냥감을 쫓아 이동하던 우리 조상들이 한때는 육지였던 북극의 베링해협을 통해 아메리카로 건너가거나 남방의 오세아니아로 내려가던 중간지대였고, 아직은 미약하지만 한반도 지역의 고인류학 연구는 '한민족'의 '조상'을 찾기 위함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명멸하면서 우리 인류에게 '유전자'를 남긴 수많은 종들을 찾는 작업 중 하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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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은 사실 '허상'일 뿐입니다. 생물학적 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개념입니다.
한반도의 고인류를 찾고 연구하는 일은 단일민족의 기원을 찾는 일이라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국경이 없던 시절, 바다(서해/남해)가 땅이었던 시절에 지금의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고인류는 '한민족'이 아니라 '인류'였다는 사실을 다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인류의 진화], <19장. 단군의 자손>, 이상희, 2023.
'가설'도 '약속'처럼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가설'을 깨고 다시 세우기 위해 미지의 땅을 계속 발굴해 가는 과정이다.
인류진화사도 그렇고,
이를 연구하는 과학인 고인류학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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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류의 진화 - 아프리카에서 한반도까지 우리가 우리가 되어온 여정], 이상희, <동아시아>, 2023.
2.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3. [루시의 발자국](2020), 후안 호세 미야스/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 남진희 옮김, 김준홍 감수, <틈새책방>, 2021.
4. [사피엔스], 유발 하라리, 조현욱 역, <김영사>, 2011.
5. [기후의 힘], 박정재, <바다출판사>, 2021.
6. [로마의 운명(The Fate of Rome)](2017), Kyle Harper, 부희령 옮김, <더봄>, 2021.
7.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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