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한 지 4년 차다. 독립을 하고 나서야 하루 세끼 먹는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알았다. 처음엔 호기롭게 요리에 도전해 봤다. 칼질부터 불조절까지 모든 것이 서툴다 보니 완성까지 오래 걸렸다. 맛도 썩 대단하지 않았다. 남은 재료는 썩고 돈은 배가 들었다. 요리와 멀어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후 4년 동안 밥솥을 사지 않았다. 밥 짓는 일은 자주 벌이지 않는 데다가 햇반이라는 대체재가 있었다. 햇반에도 잡곡밥이 있었고 가격도 천 원대로 저렴했다. 반면 밥솥은 20만 원이었다. 물론 5만 원짜리도 있었지만 내 기준에 맞는 밥을 지으려면 20만 원은 줘야 했다. 그런데 밥을 자주 해 먹을 수 있는 실력도, 여건도 아닌 상황이니 햇반이 합리적이었다. 그렇게 끼니를 햇반에 위탁했다.
그렇게 4년을 보낸 지금은 오히려 요리를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건강과 물가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리하지 않는 삶에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밥을 못 챙기는 이유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퇴근하면 시간이 많지 않고 몸도 지친 데다가 요리 말고도 다른 챙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과 회사가 나를 챙기는 일보다 우선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내가 있고 나서 일이 있고, 회사가 있는 것인데 그것들 때문에 나를 돌볼 시간이 없다니. 직장 생활을 하는 12년 동안 나를 돌보기보다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일은 왜 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나를 더 챙기고 싶었다. 모든 것을 덮어 두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인생에서는 ‘나’가 먼저였다.
물론 요즘같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점점 분업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옛날에는 직접 농사해서 자급자족했지만 점차 농작물도 한두 가지로 전문화하고 내 것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며 살아가게 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자영업자와 기업이 등장했고 직장인인 나는 나만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가면서 내 밥을 그들에게 위탁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래도 뭔가 찜찜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손으로 가능한 부분인지,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부분의 한계를 결정하고 건강을 지켜내기 위한 위탁의 바운더리를 정할 수 있는 기회를 우선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우선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무지성 위탁이다. 유난 같기도 하지만 좀 더 내 삶을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꾸리고 싶었다. 그래서 식단에서 가장 근간이 되고 있는 밥부터 내 손으로 지어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직금으로 밥솥을 사게 된 것이다.
밥솥을 사고 나니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혈당 스파이크를 방지하고 영양소를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잡곡밥을 짓고 싶었는데 대체 잡곡이라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몇 가지의 곡식이 잡곡인 것이며, 어떤 종류의 곡식을 골라야 되는지 막막했다. 몇몇 의사들에 의하면 잡곡은 최대 5가지 여야 한다고 했다. 16곡, 25곡 등 많은 잡곡을 섞으면 효과가 떨어진다. 한 그릇을 먹었을 때 각 곡식당 포함된 양이 극히 적어지므로 오히려 잡곡의 영양성분을 살리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밥을 잡곡으로만 지으면 식이섬유가 과도하게 많아져 다른 반찬의 영양분이 몸 밖으로 과다하게 배출된다고 한다. 그래서 5:5, 3:7 정도로 잡곡과 흰쌀의 양을 각자의 건강 상황에 맞게 조절해야 한다.
잡곡의 종류도 체질과 목적에 따라 달리 선택해야 했다. 보리와 귀리는 콜레스테롤과 혈당을 낮춰 심장질환과 당뇨에 좋고, 기장과 수수는 항산화 물질인 폴리페놀이 풍부해 염증 완화와 암세포 증식 억제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지병이 있을 경우, 가령 신장 질환이 있다면 오히려 이런 잡곡이 신장에 부담을 주어 잡곡의 비율을 줄이는 것이 더 건강에 좋다고 한다. 내게 맞는 잡곡을 찾으려고 하면 아직도 좀 더 공부할 내용이 많다. 잡곡밥을 지으려고 하니 이렇게나 많은 것을 챙겨야 했다.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햇반에 위탁하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시간과 체력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남는 그것들을 내가 아닌 외부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부동산 공부, 브런치 글쓰기, 사이드 프로젝트 등 게을리 보내지 않은 시간도 있었지만 분명 이것들을 하고도 남은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이 담긴 콘텐츠를 보는 데 썼다. 도움이 되는 콘텐츠도 분명 있었지만 킬링타임용으로 흘려보낸 시간도 결코 적지 않다. 이 시간은 다른 이의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내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을 나를 챙기는 데 써야 했다.
그래서 퇴사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나를 돌보려는 시도다. 말처럼 거창하지는 않다. 가장 쉽고 간단한 15분 컷 레시피만 도전 중이다. 너무 어려운 목표, 큰 목표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한다. 이제 내 인생은 외주로 맡기기보다는 소박한 가내수공업으로 살고 싶었다. 내 남은 에너지를 외부에 소모적으로 흘려보내기보다는 나를 위해 쓰고 싶다.
시간이 많음에도 요리가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시간 남아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볼 거잖아? 그 시간에 나를 위한 밥을 짓자.' 생각하면 무겁던 엉덩이가 움직인다. 내가 만족하는 삶을 찾아 타인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지고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삶에 대한 의지겠다. 작더라도, 소박하더라도, 별 것 아니더라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해내고 나만의 기준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내 밥은 내가 짓고 싶다.
* 12년 차 직장인이 2024년 6월 무계획 퇴사를 하고 퇴사 전후의 생각과 회사로부터 자립하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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