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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샘 Jan 20. 2022

지레 겁먹고 포기하기 전에 보면 좋은 글

한라산 겨울 산행이 나에게 알려준 것


주간 백수부부 2022 시즌7. 6화 글쓴이 아내(망샘)




겨울 산은 처음인 등산 초보자 주제에 극악 코스인 관음사를 간다고?



3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백록담을 일 년 새 두 번이나 봤다. 심지어 엊그제는 눈 쌓인 백록담을 다녀왔다.

등산이 취미냐고? 우리 부부는 등산과 거리가 멀다. 서울에 살 땐 그 흔한 북한산 한 번 다녀오지 않았다. 그런 등린이(등산 어린이)들이 겁도 없이 눈이 쌓인 한라산 정상을 찍은 것이다.


세계여행을 하며 팔자에도 없는 하이킹으로 유명한 몇몇 도시에 갔었다. ‘세계 5대 미봉’에 꼽힌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의 피츠로이도 그중 하나. 처음 9km 코스는 순한 맛이었는데 마지막 1km가 불닭볶음면이었다. 순한 맛에 얕봤다가 매운맛에 큰코다치고 넘어져서 무릎도 다쳤다. 최고로 힘든 트레킹이었지만 인생 가장 멋진 풍경을 선물 받았다.


피츠로이는 정상도 멋있지만 오르는 길이 압도적이다.



파타고니아. 절경이다.



이번에 다녀온 한라산 관음사 코스는 딱 2년 전 피츠로이 같았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처음부터 거의 내내 불닭볶음면 맛이었지만. 스틱에 의지해 두 발이 아닌 네 발로 올라갔고, 쌓인 눈 덕에 내려올 땐 스키장처럼 주욱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래도 좋았다.


2주 전 방영된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가 등반한 방송이 나간 후 한 달 뒤 예약이 꽉 찼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고: 백록담 정상을 등반하기 위해서는 예약이 필수. ‘성판악’ 코스는 하루 천 명, 우리가 다녀온 ‘관음사’ 코스는 하루 5백 명만 예약 가능)

우리는 운 좋게 방송하기 며칠 전에 예약해 2주 뒤로 잡아둔 상태였다. 때는 1월 1일, 새해니까 좋은 기운도 받고 몸과 정신도 쇄신할 겸 한라산 등반 코스 중 가장 극악 난이도인 관음사로 예약했다. 물론 날씨를 보며 여차하면 취소할 심산이었다.



출처: 네이버 이미지 검색 /이 방송보고 취소할까 고민했다. 너무 힘들어 보여서ㅎㅎㅎ


등반을 일주일 남기고 한라산 등반권을 중고로 거래한다는 뉴스를 전해 들었다. 이 정도로 핫하다면 가는 수밖에. 그날 밤 눈꽃 산행의 필수품인 아이젠과 스패츠를 세트로 구입했다.

그러나 수요일에 주문한 택배가 다음주 월요일까지 오지 않았다. 취소하라는 계시인가, 매일 업데이트되는 입산 통제 여부를 은근히 취소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확인했다. (1월 15일, 우리가 가기 3일 전까진 통제였다) 하지만 일기예보는 더할 나위 없는 ‘맑음’이었다.


그렇게 화요일 아침이 밝았고, 전 날 끓여둔 소고기 뭇국에 밥까지 말아 든든히 먹고 6시 반 경에 깜깜한 집 밖으로 나왔다. 7시 20분,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어두웠다. 여차하면 내려올 심산으로 부지런히 장비를 차고 있는 다른 사람들 틈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롱 패딩만 있어 패딩 없이 플리스와 히트텍, 경량 패딩을 5겹 겹쳐 중무장하고 올랐다.


워낙 험난하다는 악평을 들어 걱정한 것치고는 오를 만했다. 훨씬 순한 맛이라는 ‘성판악’ 코스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였다. 아마도 돌, 계단이 많은 코스인데 눈으로 다 덮여 평지처럼 변했기 때문 아닐까? 아이젠을 끼고 스틱으로 지탱하며 걸으니 오히려 쉬웠다. 그렇게 중간중간 챙겨간 간식과 라면, 김밥까지 해치우고 4시간 만에 해발 1950미터 백록담에 올랐다.


2022년 1월의 백록담. 역시 절경이다.



눈이 내려앉은 백록담은 장관이었다. ‘세계 5대 미봉’이라는 피츠로이의 정상과도 견줄 만큼 황홀했다. 백록담도 멋있었지만 사실 처음 오르는 풍경부터 정말 좋았다. 처음 마주하는 설산의 자태는 직접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상녹수 위에 내려앉은 눈꽃, 그 사이로 열린 파란 하늘까지, 머리가 절로 맑아졌다. 지레 겁먹고 포기했다면 너무나 아쉬웠을 순간이었다.


무릎이 안 좋아 하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나지만, 눈 덕분에 미끄러져 내려오니(?) 3시간 만에 하산할 수 있었다. 그렇게 8시간 동안 설국을 만끽했다.




 해발 4600미터 위에 있는 페루 와라즈 69호수. 설산과 에메랄드 물빛은 평생 못 잊을 풍경 중 하나다.


눈을 밟으며 약 21킬로미터를 하염없이 걸으며 한 가지 생각이 계속 스쳤다. ‘나는 못해’, ‘내가 저걸 어떻게 해’ 이런 생각으로 자신감을 갉아먹을 시간에 그냥 하면 된다고. 사실 작년에 출간한 책에도 4600미터의 페루 69 호수를 등반하며 비슷하게 느낀 생각을 적었다. 그새 까먹고 또다시 자신감 결여 상태였는데 한라산에서 많이 충전됐다.


비록 등산 스틱에 의지해 4발 보행을 할지언정 멈추지 않고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정상에 도착해있다. 사실 정상에 안 가도 괜찮다. 걸으며 마주한 풍경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니 올해는 지레 겁먹지 말고, 고민하지 말고 그냥 고(Go!)하자. 한라산에 다녀오길 정말 잘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그전엔 너무 어두워 약간 동이 트기 시작할 7시 20분에 등산을 시작했다.
백록담으로 가는 관문. 마지막 헐떡고개일줄 알았으나 헐떡고개가 한 15개쯤 있었던 듯하다.


2시간 30분 후, 삼각봉 대피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라면과 김밥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며 30분간 휴식하고 마지막 스퍼트를 올려 백록담으로 향한다.



고개를 돌리면 구름 위에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어 힘듦이 반감되었다.
구름 뒤로는 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보인다. 산에서 바다가 보이는 멋진 도시가 얼마나 될까? 제주는 최고다.
1시간 20분 후, 눈덮인 백록담을 마주했다.
매운맛 코스지만 눈으로 덮여있어 아이젠과 스틱만 있다면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내려오는 길. 올라갈 땐 이 비석을 보고 '아직 천 미터라니ㅠㅠ' 좌절했는데 내려올 땐 금방이다.


근 한시간 가량은 발가락과 무릎에 힘이 없어 좀비처럼 걸었다. 33,000보를 걸었던 산행 끝!



겨울왕국이었던 1월의 한라산. 인생에 꼭 한 번쯤은 도전해보시길 추천드린다.





백수부부의 글은 월, 목요일 오전 8시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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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에피소드 읽기>


시즌7. 5화 글쓴이 파고(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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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7. 4화 글쓴이 망샘(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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