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은의 Beyond Insight Dec 18. 2016

겨울의 시

마흔한 번째 지난주




마지막 계절


 얼음 위를 건너온 바람은 차게 식은 채, 우리를 찾아온다. 겨울이다. ‘삼계절’ 보다 ‘사계절’이 더 아름다운 운율인 것인지, 질척거리고, 미끄럽고, 오들거리기만 하여 도대체가 불필요한 것마냥 생각되는 이 계절이, 계절들의 끝에 나 몰라라 붙어있는 꼬락서니가 영 마뜩잖다. 이토록 차갑기만 한 계절이 그나마 존재의 명분을 들이미는 유일한 작용은 '낭만'이다. 쌓인 흰 것들에 좀처럼 앞으로 나가기 힘들면, 뒤도 돌아보고, 그러다 감상에 젖기도 하고, 서정을 흩뿌리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겨울을 노래한, 아니, 마지막 계절을 앓는 시인들의 서정적 신음은 도처에 웅크리고 있다. 몇몇을 데려와 몸이라도 좀 녹이십사 한다.               







겨울의 시     


12월의 정거장 
                                        이용한

그리하여 12월
검은색 점퍼는 국립보건원 앞에서 156번 버스를 타고
기자촌에 정거하였다
일몰과 함께 찾아온 눈발을 북한산에 두고
자, 이쯤에서 다음 생을 기다릴까
보따리 같은 이 시간을 정거장에 두고
비행접시를 기다리듯
열두 살의 코 묻은 인생으로 돌아가
아무렴, 다음 생은 지금보다 낫겠지
살구꽃처럼 눈발 날리는
적막한 기자촌에서
일몰 속의 검은색 점퍼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12월의 정거장
눈길에 미끄러지며 버스가 한 대
꽤액, 이번 생을 지나쳐 간다. ¹       

   

 12월이다. 어떤 달(月)이 어떤 계절이라는 확신은 어떤 날(日)이 어떤 계절인가라는 연쇄적 질문을 가능하게 하기에, 움찔한다. 기실 경계는 모호하다. 하지만, 12월은 겨울이다. 단호하다. 아니, 단호하자! 그리고 겨울의 시작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검은색 점퍼 입은 사내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리하여 12월”이라는 첫 마디라니……. 대체 지난 열 한 번의 달들이 어떠하였기에, 마치 대장정의 말미를 읊는 듯 시작(始作)하는 시작(詩作)일까? 안 되겠다. 좀 더 쫓아가 본다.     

 

 은평구 진관외동 175번지 일대에 있던 마을, 바로 검은색 점퍼가 향한 “기자촌”이다. 이름 그대로 기자들이 모여 살던 곳인데, 어떤 연유로 검은색 점퍼가 그곳을 향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거장에 내려서도 어떤 행보가 없는 것으로 보아, 그저 정거장을 떠돌 뿐임을 짐작한다. 그런데 기자촌 정거장에서는 어떤 아라비아 숫자로 된 버스가 아닌, “다음 생”을 기다린단다. “보따리 같은 이 시간은 정거장에 두”겠다 하니, 시작하며 읊던 “그리하여 12월”이 이제야 차갑게 목덜미를 감싼다. 검은색 점퍼는 이내 추억에 잠긴다. 버스 정거장에는 올 리 없는 “비행접시”를 기다리는 “열두 살의 코 묻은 인생”으로 돌아가는 게다. 겨울이라는 마지막 계절이 쉽게 허락하는 회한인 양 싶다. 그리고 자꾸만, 자꾸만 뒤돌아본다. 검은색 점퍼가 하염없이 돌아보기만 하는 12월의 정거장에 드디어 버스가 당도한다. “꽤액” 아니다. 당도하는가 싶더니, 그저 지나쳐 간다. 12월의 정거장에는 검은색 점퍼만 남았다.   


*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허수경

간곡한 기계가 있었다 우리 앞에
우린 그 기계 앞에 서 있었다
기계는 우리를 온 힘으로 찍었다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너를 동물원에 앉아 있는 나를
돼지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종사촌과 나를 찍었다     

머리칼을 잘라 팔던 날
우연히 지나가던 사진사가 날 찍었다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나에게로 왔다 ²     


 여기 또 한 사람이 뒤를 돌아보고 있다. 그 뒤에는 “간곡한 기계”가 찍어놓은 결과들이 놓여있다. 고맙게도 그 기계가 “우리를 온 힘으로 찍”어 준 덕분으로 “시계탑 앞에 서 있는 너”와, “동물원에 앉아 있는 나”와 “돼지우리 앞에 앉아 있는 이종사촌과 나”와 언제든지 재회한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겨울의 것이었다.  

   

 분명 머리칼이 길면, 조금이나마 더 따뜻할진대, 어떤 사연 때문인지 “머리칼을 잘라 팔던 날”이었다 한다. 비비언 마이어 ³ 마냥 스냅사진을 찍는 사진사였던지, 하필이면 팔 양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잘라낸 시인을 찍었단다. 그리고 그 사진은 “눈송이까지” 박힌 채로 왔다. 가뜩이나 움츠러드는 계절에, 시계탑과 동물원과 돼지우리 앞에서 빛났을 머리칼은 사라져 더없이 웅크린 시인과 그 겨울날의 기억이 눈송이처럼 박혔다.          

**






눈보라 속에서       
                                        정회성     

오늘처럼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는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원고를 들고 마포길을 걸어
제 이름도 빼앗긴 출판사로 간다
낯익은 이 길이 왠지 낯설어지고
싸우듯 뺨을 부비듯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나는 눈시울이 뜨겁구나
시는 아무래도 내 아내가 써야 할는지도 모른다
나의 눈에는 아름다움이 온전히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다
박종철군의 죽음이 보도된 신문을 펼쳐 들며
이 참담한 시대에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살아 남기 위하여 죽어 있는 나의 영혼
싸움도 사랑도 아닌 나의 일상이
지금 마포 강변에 떨어져
누구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까
단 한번, 빛나는 사랑을 위해
아아 가뭇없이 사라지는
저 눈물겨운 눈발 눈발 눈발 ⁴


 팔 것이 글 뿐인 시인은 취향의 같음과 다름 따위는 따지지 않고,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는 / 아내의 말”을 떠올리며 “제 이름도 빼앗긴 출판사”에 글 팔러 간다. 그 길은 분명 익숙할 것인데, 어떤 천명이 떠올랐는지 “낯설어지고”, 눈시울마저 뜨거워진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시를 쓰는 일이 아내에게 더 잘 어울릴 것이라는 슬픔으로 인한 것일까? 좀 더 따라가 본다.     


 시인은 이제 “아름다움이 온전히 / 아름다움으로 보이지 않”는단다. 그리고는 이토록 “참담한 시대”에 시를 쓰는 이유를 묻는다. 그랬다. 이는 단순한 현실의 암울함이 아닌 ‘시의 위기’이자, ‘시인의 위기’ ⁵ 였던 것이다.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고 점진적으로 민주화의 길을 가던 그 지점에서, 시인은 도리어 길을 잃고 방황한다. 저문 강에 삽을 씻던 시인은 이제 마치 “살아남기 위하여 죽어 있는 나의 영혼”으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리고 시절을 지나버린 자신의 시가 “지금 마포 강변에 떨어져 / 누구의 발길에 채이고 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에 휩싸인다.     


 박종철이라는 아픈 이름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정확한 연도를 떠올린다. 그런데, 한없이 기이하기만 한 2016년의 겨울을 시작하는 이 문턱에 시인이 던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은 더욱더 엄중하게 다가온다. 이 질문은 비극적이게도 1987년의 겨울뿐만이 아닌, 2016년의 겨울을 살아가는 시인에게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똑같이 유효한 탓이다. 겨울이 깊고 깊고 깊다.     


***






     

기이한 겨울에 시를 읽는다는 것     


 유난히 기이한 겨울이다. 다음 생을 기다리는 12월의 정거장도, 아픔이 각인된 겨울날의 사진도 그리고 시인의 한탄도 모두 어색하지가 않다. 아니다. 도리어 또렷해졌다. 그리하여 그중에서도 단연 기이한 겨울이다. 삶이라는 전장(戰場)도 버거운데, 주말이면 촛불을 밝히는 동안에 이 계절이 불쑥 찾아온 것이다. 그러자 마치 짧은 봄이 지나고 곧바로 긴 겨울이 시작된 기분이어서, 좀처럼 서정(抒情) 둘 곳이 없다. 서정도 사람의 일이라, 두던 데가 달라지면 길을 잃기도 하는 탓이겠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던 우리에게 단 하나의 외침만이 허락된, 이 기이한 겨울의 싸움이 그저 넓디넓은 평지만 같다.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첫눈
                                        김경미     

하고 싶은 말 다 해버린 어제가 쓰리다
줄곧 평지만 보일 때 다리가 가장 아팠다
생각을 안 했으면 좋겠다 ⁶     


 그래도 간다. 끝까지 간다. 이겨야 봄이 올 것이다. 봄 맞으러 가자.          






참고

¹

 - 이용한, 『안녕, 후두둑 씨』, 실천문학사, 2006 중 「12월의 정거장」     


²

 - 허수경,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 창작과 비평사, 2001 중 「어느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이」    

 

³

 - 비비언 도로시어 마이어(Vivian Dorothea Maier, 1926년 2월 1일 ~ 2009년 4월 1일)는 미국의 사진가이다. 2013년 마이어를 소재로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비안 마이어를 찾아서》가 개봉하였고, 제87회 아카데미상 장편 다큐멘터리 부문에 후보로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 위키백과 “ 비비언 마이어”

 - ko.wikipedia.org/wiki/비비언_마이어     


 - 정희성,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창작과 비평사, 2001 중 「눈보라 속에서」

     

 - 이숭원, 『이숭원 평론선집』,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5      


 - 김경미, 『고통을 달래는 순서』, 창작과 비평사, 2008 중 「첫눈」          




이미지 출처

커버 이미지

 - 2011년 2월, 서울대학교 운동장, 직접 촬영     


*

 - ‘골목을보라’ 님의 핀터레스트

 - kr.pinterest.com/pin/502221795918049206/     


**

 - ‘마음사전’ 블로그, 2014년 1월 21일 자, “눈오는 날에..1” 중

 - maumi65.tistory.com/7515680          


***

 - '미레시' 님의 블로그, 2009년 12월 31일 자, “눈덮인 한강” 중

 - prologue.blog.naver.com/PostView.nhn?blogId=22852580&logNo
=50079386589&parentCategoryNo=51&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
=false&from=postView     


****

 - 열매맺는나무 Fruitfulife 홈페이지 중 2012년 9월 2일 자 “옴라이터(Ommwriter)” 관련 글 중
  - fruitfulife.net/659



이전 03화 가을의 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