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위한 발자취
내겐 두 가지 종류의 글쓰기가 있다. 첫째는 직업적 글쓰기이고, 둘째는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이다.
내 직업적 글쓰기에는 내용과 관계없이 정해진 형식이 있고, 그 형식에 맞춰 내가 전달해야만 하는 내용들을 적절하게 적어나가야 한다. 형식과 내용이 정해져 있기에 내 산만한 글도 어느 정도 자연스레 정리가 되곤 한다.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이해시킨 뒤, 그들로 하여금 관련된 일을 통해 내 글의 영향력을 강화하게끔 하는 것이 내 직업적 글쓰기의 본령이다.
글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라면 작업 하나하나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어느 정도 일관된 퀄리티를 기계적으로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점은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의 과정도 나름 고뇌의 시간을 거친다는 것이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글쓰기에서조차 스스로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 중 하나는 나를 위한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점이다. 이 브런치의 첫 번째 글인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에서 얘기했듯이, 타자에게 글을 내보이지 않더라도 가장 엄격한 비평가는 자기 자신이기에 자신의 현재를 받아들이는 게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글쓰기를 마친 뒤에는 묘한 만족감이 든다. 그것은 자기 이해의 쾌감이기도 하며 나름대로 스스로의 "작은" 성장에 바탕을 둔 "도파민" 반응이다. 나를 위한 글쓰기에 대해 좀 더 파고들어 보자.
직업적 글쓰기와 달리, 나 자신을 위한 글쓰기는 나를 최중요 독자로 상정한다. 대체로 내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하기 위한 작업의 과정이며, 그 결과물로써의 글은 자신 이외의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지 전혀 예상이 되지 않는다. 물론 글을 쓰는 과정 자체가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퇴고의 과정들은 늘어놓은 내 생각들을 적절한 순서로 다시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글이 완성되는 순간은 나 스스로 내 생각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에 대한 가치판단이 글로써 적히는 그 순간이 된다.
이러한 글은 타인에게 읽힐 가치가 있는 글인가? 상정하지 않은 독자에게 글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나를 위한 글쓰기는 과연 남을 위한 글쓰기가 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생각과 행동에 조금이나마 기여한다면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남을 위한 글쓰기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누군가는 내 사고 과정의 결과로써 생겨난 이 글이 흥미롭거나 얻어갈 것이 있지 않을까? 한국어 화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신의 모어가 아닌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시대인만큼, 나는 내 발자국이 누군가에게 예기치 못 한 방식으로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생각한다.
예전에 우치다 타츠루의 한 책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나온 것을 기억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 짓기"를 통해 프랑스의 계층사회를 비판하였으나, 그 저술 자체는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만이 읽고 이해할 수 있었기에 비판의 주체조차도 그런 계층적 특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따라서 누군가는 배타적인 글에 초대받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전달의 글쓰기를, 누군가는 초대받지 않았더라도 어떠한 메시지를 수신해 갈 수 있는 글쓰기를 해야만 한다.
나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오로지 나 자신만을 초대받은 독자의 지위에 올리고자 한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 누구도 내 글쓰기의 대상으로서 소외되지 않을 것이다. 내 글의 메시지는 다름 아닌 내 생각의 아바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당신이 내 글에서 수신한 메시지는 사실상 나의 메시지가 아니라 내 글에서 촉발되어 당신의 사고를 통해 형체를 갖게 된, 내게 반응해 대답하는, 그대 자신의 메시지이다. 즉, 나의 메시지가 아닌 그에 반응해 나타난 당신의 '대답'이다. 그 대답을 통해 당신이 그대 자신과 더욱 깊이 소통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언급된 인물 소개
1. 우치다 타츠루: 일본의 인문학자. 프랑스 문학과 철학 전공. 개인 홈페이지. 한국에도 다양한 저서가 번역 출간되어 있다. 대부분의 저서들은 읽기 쉬운 평이한 문체로 쓰여있다. 마땅한 한국어 소개 페이지를 찾지 못해 나무위키 페이지를 달아 놓았다.
2. 피에르 부르디외: 프랑스의 사회학자. 저서 "구별 짓기"에 나온 아비투스(Habitus)라는 개념을 통해 대중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제 브런치 출사표에 해당하는 "내 삶 마주하기"의 1부, 방향 매니페스토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에는 2부에 해당하는 "취향 크레바스" 편이 7편 정도 올라올 예정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이 지면을 통해 저를 위한 글쓰기를 지속하려 합니다. 제 글들을 통해 당신이 마음속 '회신'을 통해 소통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제 글의 화룡점정은 여러분의 발자취입니다. 이 마지막 한 조각을 통할때 비로소 제 글은 제 자신을 넘어선 우리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소중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목록: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우치다 타츠루의 부르디외에 관한 코멘트는 차후 관련 내용 재확인 후에 수정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언급된 인물 소개의 내용은 나중에 제 의견을 포함하여 수정 될 수 있습니다.)
(아래의 보조 태그들은 실험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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