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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非酒類) 기호식품: 커피와 차를 중심으로

취향 크레바스: 입맛의 미학 - 1

by 방향

비주류(非酒類) 기호식품: 커피와 차를 중심으로

전편에서 탁월함이 깃든 감각적 즐거움은 정신적인 만족감마저 충족시킨다는 얘기를 했지요.


가장 보편적인 감각적 즐거움 중 하나는 당연히 먹고 마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중 제 라이프스타일을 돌아볼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차와 커피입니다.


이번 편은 제 취향을 돌아보는 것을 통해서 감각적 만족과 정신적 만족 사이를 이어주는 "탁월함이 주는 감동"이 어떻게 제 정신 세계에 작용하는지를 파악해서 자기 이해의 발판으로 삼고, <취향 크레바스> 더 나아가 미처 파악하지 못하던 내면의 <크레바스>를 탐색하면서 내 삶을 마주하는 여정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야기에서 중요한 순간에 나오는 회상만큼 흐름을 끊는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잠시 저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봅시다.


제가 차를 본격적을 접하게 된 계기를 먼저 되돌아보죠. 때는 무려 질풍노도의 시기로, 한참 외부 매체의 영향을 쉽게 받던 시기였습니다. 저는 이때 이미 순정만화를 아주 좋아했는데, <홍차 왕자>라는 만화를 보고는 현미녹차가 아닌 차를 마셔보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당시에 특히 꽂혔던 것은 네이버 지식백과를 통해 접한 "기문 홍차(祁門紅茶)의 맛과 향"에 대한 묘사였습니다.


홍차 입문자들이 한 번씩은 겪고 지나간다고들 하는 일화입니다. "기문 홍차의 난향(蘭香)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라는 호기심에 엄청난 기대를 갖고 어딘가에서 시판 중인 "기문 홍차"를 접한 다음에 훈연향과 홍차 특유의 떫은맛에 "이런 걸 왜 먹나?" 하는 일이지요.


저도 이 시기에 비슷한 일을 겪었지요. 하지만! 중학생에게 루피시아에서 나온 <기문 홍차 특급>은 여간 비싼 것이 아니었기에 저는 첫 시음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마셨습니다. 그런데 뭐든 처음 접하는 맛이나 향은 적응 기간을 필요로 하는 법이지요. 마시다 보니 희한하게도 "흠, 마시다 보니 괜찮아지는 걸?"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어린 나이에 이런 것을 즐기는 나"라는 사춘기스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용돈을 조금씩 모아 다른 찻잎들을 사모으기 시작했지요. 당시에는 주로 루피시아 매장에 찾아가서 구매하곤 했는데, 지하철 타고 서울을 돌아다니는 재미가 있었지요. 그렇게 이런 차도 마셔보고, 저런 차도 마셔보고 하니 나름의 취향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저는 가향된 차보다는 순수한 차를 더 선호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절묘한 베르가못 오일량으로 아주 훌륭한 맛이 나는 얼그레이 같은 가향차들도 좋아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까다로워지더군요. 기문 홍차에 이어 제가 좋아하게 된 홍차들은 누와라엘리야나 우바 같은 스리랑카의 실론차와 다즐링 계열의 인도 홍차들이었습니다. 슬프게도 당시의 저는 정산소종과 같은 강렬한 홍차는 마시기 어려워서 주로 은은하고 섬세한 홍차를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십 대 청소년인 저에게는 용돈이란 지금보다 더 한정된 자원이었기 때문에 찻잎을 산다는 것은 꼭 가서 시향이나 시음을 한 뒤에 해야 하는 의사결정이었습니다. 또 제 나름대로 차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즐기고, 정보도 얻을 수 있는 커뮤니티를 찾아 헤매곤 했습니다. 주변에는 그런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제 주요 정보원은 네이버 카페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였지요.


제 주변에 차를 마시는 취미의 또래를 찾는 것은 극히 힘들었기에, 새로 사귄 친구들이 있다면 초대해서 차를 마시게 하는 것이 저의 즐거움 중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희한하게도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십 수년이 흐른 지금도 차에 대한 취향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 아주 훌륭한 기문 홍차를 접하면서 지금까지도 제 최애 홍차는 기문 홍차이며, 다즐링에 있는 다원의 홍차들과 스리랑카 고지대 실론티를 좋아합니다.


한국 녹차의 경우에는 맛있게 덖어낸 우전을 좋아하며, 가끔씩 마시는 일본식 덖음차(釜炒り茶) 또한 별미이지요. 센차도 좋아하고, 계절에 따라 볶음 정도가 기가 막힌 호지차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말차는 선호하지 않지만, 최근에 방문한 서울의 단골 카페에서 맛있게 격불 해준 제주 녹차 덕분에 말차의 매력도 어느 정도는 알아가는 중이지요. 더 나아가 중국의 백차, 보이차도 고등학생 때부터 마셔왔기 때문에 나름 확고한 취향이 있습니다.


제가 차에 푹 빠지게 된 계기 중 하나는 역시 대중매체를 통해 접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티타임 풍경입니다. 저는 이런 사교 문화를 동경해서 대학교에 들어가면 사교 모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물론 실행되지 않았지만, 대신에 스즈미야 하루히를 보고 감명을 받아 고등학교 때 만든 동아리 친구들을 데리고 차를 마시려고 한 적은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차가 정신적 감동까지 선사하는 탁월한 차일까요?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미식에 대한 기준과 마찬가지로 향의 섬세함, 깊은 풍미와 맛의 복합성 및 다양성 같은 감각적 풍부함이 우선이겠지요. 그다음에 비로소 가공이나 재배, 제품에 관한 배경 스토리 등이 이러한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여 정신적인 만족감까지 주게 됩니다. 더 나아가 누구와 함께 마셨는지, 어디서 마셨는지와 같은 다양한 외부 요소들이 탁월함에 힘입어 감각적 경험을 정신적 경험으로 승화시킵니다.


반면에 커피에 대한 제 취향은 처음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이 굉장히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차에 대한 제 취향은 거의 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커피에 대한 취향은 소위 격변이라고 할 만한 변곡점들을 몇 번 겪었기 때문입니다.


차 문화에 대한 제 관심은 다도나 유럽식 차 문화와 같이 고전적인 성격을 띠는 것에 반해, 제 커피 취향은 한국 커피씬의 유행과 상호작용하면서 지금의 취향이 된 것 같습니다.


십여 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바뀌어버린 강산은 뒤로 한 채, 커피 취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면서 차와 커피가 제 내면에 만든 다중적 면모를 한 번 살펴볼까 합니다.




여러분들은 차를 좋아하시나요? 좋아하신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차를 마시기까지는 번거로운 과정이 수반되는데, 그 과정을 명상하듯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섬세한 향과 미묘한 맛의 차이를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여러분은 어떤 타입이신가요?




루피시아(Lupicia) : 일본의 차 브랜드. 다양한 다원의 차와 개성적이고 훌륭한 가향티 라인업을 보여준다. 한때 서울에 매장이 있었으나 철수하였다. 일본에 거주하던 시기에 멤버십에 가입하면 무료로 두 달 동안 그 달의 샘플티 두 종을 우편으로 받아서 마실 수 있었다. 유명한 가향차로는 사쿠란보, 화이트 크리스마스(화이트 초콜릿이 들어있어서 겨울에 마시면 몸이 살살 녹는다), 피치 우롱, 리치 우롱 등이 있다.


기문홍차(祁門紅茶): 중국 안휘성 기문현을 대표하는 홍차. 평범하게 구할 수 있는 시판 기문홍차들은 훈연향이 나기 때문에 최초의 홍차인 정산소종(正山小種)과 비교되기도 한다. 하지만 훌륭한 기문홍차는 장미향을 비롯해서 아주 뛰어난 맛과 향을 보여준다.


우전(雨前): 24 절기 중 하나인 '곡우(穀雨)' 전에 수확한 이른 봄 차. 주로 녹차로 마십니다. 곡우 이후에 수확한 봄차는 세작(細雀)이라 부릅니다.


센차(煎茶)와 카마이리차(釜炒り茶): 일본의 녹차. 센차는 덖지 않고 증기로 찌기 때문에 맛있는 한국 녹차에서 나는 익은 옥수수 같은 고소한 맛이 나지 않고, 푸른 맛이 난다. 카마이리차는 가마에서 덖는 과정이 추가되는데 일본에서는 비주류에 속하는 제법이다.


우바(Uva, உவா), 누와라엘리야(Nuwara Eliya, நுவரேலியா): 스리랑카 고지대의 유명한 홍차 산지.


다즐링(Darjeeling): 인도 고지대의 유명한 홍차산지. 청량한 청포도향이 일품인 홍차가 나오는 곳.


소위 3대 홍차라 함은 기문, 다즐링, 우바 홍차를 일컫는데, 충분한 금액을 투자하면 아주 훌륭한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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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목록: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1 : 나를 드러내는 글쓰기의 두려움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2 : 방향의 의미

1부 방향 매니페스토 - 3 : 나를 위한 글쓰기

2부 취향 크레바스 - 1 : 쌈띵 온 열 마인드?

2부 취향 크레바스 - 2 : 너 자신을 알라, 그 첫걸음

2부 취향 크레바스 - 3 : 입맛의 미학 (1)

2부 취향 크레바스 - 4 : 입맛의 미학 (2)

2부 취향 크레바스 - 5 : 입맛의 미학 (3)

2부 취향 크레바스 - ?? : 내 마음이라는 설원

4부 돌아가는 펭귄 드럼 - ?? : 삶을 위한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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