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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오늘도 자기 시간을 산다

호프 자런 <랩걸>

by 뭉클

학교 운동장 한켠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서 있다.

270년의 그림자가 하루의 그림자와 겹친다.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면 졸업생들은 어릴적보다 한층 커진 품으로 오래된 나무를 껴안는다.

그들은 말한다. 그때도 이 자리에 있었다고.

계절은 네 번의 호흡을 반복하고, 나무는 더 긴 호흡으로 그 모든 시간을 통과한다.

수업을 알리는 시종소리와 아이들의 달음박질과 함성 그리고 늦은 오후의 적막이 차례로 나무그림자에 포개진다.

올해, 느티나무는 식물의사의 처방을 받았다.

우레탄폼으로 막혀 있던 겉옷이 벗겨진다.

통풍이 되지 않아 병들고 썩어가던 나무의 내피가 드러난다.

이틀에 걸친 대수술 끝에 살균, 살충, 방부 처리를 받고, 드디어 통기성 좋은 그물망 옷을 입는다.

지지대 세 개가 지팡이처럼 노구의 몸통을 받친다.

멀리서 보면 여전히 웅장하지만, 가까이서는 처치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앞에 서면 사람들은 한동안 말이 없어진다.

아픔은 분명하지만, 나무는 아픔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표면의 결은 거칠고, 나무의 온기는 손바닥에 남는다.

식물의사는 느티나무의 자기 치유를 설명한다.

느티나무는 병든 부위를 고립시키고 흐름을 우회하며, 새 조직을 돋워 스스로를 지탱하는 자기치유를 한다. 설명은 과학이지만, 풍경은 철학처럼 다가온다.

오래 견디는 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먼저 자라는 방식.

눈에 보이지 않는 치유가 먼저이며, 눈에 띄는 일은 나중에 온다는 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느티나무도 연약한 묘목의 시절이 있었겠다.

밤에는 냉기가 내려앉고, 낮에는 흙이 갈라지던 해를 여럿 보냈겠다.

껍질이 크게 터진 해, 번개가 스친 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뿌리는 아래로, 더 아래로 뻗었다.

속이 빈 자리는 오래 버텨 온 증거처럼 남고, 그 둘레로 새살의 켜가 겹겹이 둘린다.

바람은 표면을 문질러 결을 매끈하게 만든다.

나무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뿌리를 돌아보게 한다.

이 대목에서 호프 자런의 문장을 생각한다.

“내 은청가문비는 생존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내 나무는 삶을 살고 있었다. ......
시간은 나, 내 나무에 대한 나의 눈, 그리고 내 나무가 자신을 보는 눈에 대한 나의 눈을 변화시켰다.”
— 호프 자런, <랩걸>, (주)알마

버틴 것이 아니라 살아냈다는 말, 그 차이가 풍경을 바꾼다.

시선은 나무의 처음, 씨앗으로 이어진다.

“씨앗은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대부분의 씨앗은 자라기 시작하기 전 적어도 1년은 기다린다. 체리씨앗은 아무 문제 없이 100년을 기다리기도 한다. 각각의 씨앗이 정확히 무엇을 기다리는지는 그 씨앗만이 안다. 씨앗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 그 기회를 타고 깊은 물속으로 뛰어들 듯 싹을 틔우려면 그 씨앗이 기다리고 있던 온도와 수분, 빛의 적절한 조합과 다른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는 신호가 있어야 한다. ......
숲에 들어간 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으로서는 도달할 수 없는 높이로 자란 큰 나무들을 올려다볼 것이다. 그러나 발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드물다. 발자국 하나마다 수백 개의 씨앗이 살아서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그다지 가망은 없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고 절대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기다려 그 씨앗 중 절반 이상은 자기가 기다리던 신호가 오기 전에 죽고 말 것이고, 조건이 나쁜 해에는 모두 죽을 수도 있다.
이제 숲에 가면 잊지 말자.
눈에 보이는 나무가 한 그루라면, 땅속에서 언젠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기를 열망하며 기다리는 나무가 100그루 이상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 호프 자런, <랩걸>, (주)알마

운동장의 느티나무도 하나의 씨앗에서 시작했다.

비와 바람과 햇빛이 맞아떨어진 어느 날, 그 한 번의 신호가 닿자 껍질은 미세하게 벌어지고, 작은 몸은 흙을 밀어 올렸다. 그때부터 나무의 생의 박자는 사람의 시간과 달랐다.

빠르지 않되 멈추지 않는 박자였다.

사람의 생은 대개 오늘과 내일의 박자에 맞춰 돌아간다.

증거를 서둘러 보여줘야 하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나무가 가르치는 시간은 다르다.

뿌리가 먼저이고, 가지는 그 다음이다.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다.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자라는 동안, 겉은 조용히 기다린다.

느티나무의 치료는 그 진실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상처를 도려낸 뒤, 나무는 잠시 침묵에 들어간다.

통로가 재배열되고 성장이 물길을 찾고 방향을 찾는 동안, 겉은 침묵하는 듯 보인다.

어느날 아침, 새 잎이 돋아난다.

연두색은 낯설고, 주름은 어리다. 작은 손바닥 같은 잎이 바람에 가볍게 떨린다. 미세한 떨림은 큰 사건처럼 풍경을 바꾼다. 그렇게 기다림의 문이 소리 없이 열릴 것이다.

바람이 바뀌고, 해가 기우는 각도가 달라진다. 흙 냄새가 달라지는 순간이 하루에 몇 번, 계절마다 찾아온다. 나무는 묵묵히 땅과 공기의 신호를 읽는다.

그러니 나무에게는 270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쌓여서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우리에게도 태풍과 혹한의 겨울, 뜨거운 여름이 있다. 나무처럼 실패와 휴식 그리고 다시의 시작이 반복된다. 나무의 한 해와 우리 삶의 한 해를 겹쳐보니, 조급함이 조금씩 옅어지지 않는가.

뿌리를 더 깊게 내리는 날의 정적은 불안이 아니라 필요 충분한 기다림과 선택의 시간이 된다.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울지, 어디에 뿌리를 내릴지 스스로 정하는 시간이다.


운동장의 느티나무는 오늘도 자기 시간을 산다.

그림자는 해를 따라 길어진다.

잎들은 바람이 스치면 잠시 빛나고, 빛이 지나간 자리에는 더 깊어진 뿌리가 남는다.

그 풍경은 나즉히 속삭인다.

오래 기다리는 시간이, 우리를 오래 그리고 깊게 자라게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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