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냉커피 한 병의 무게

마음이 버틴 자리들 [9장]

by 이도화
“운동회 날, 우여곡절 끝에 타 간 커피가 든 보온병을 안고 있던 나.”

초등학교 3학년,
5월의 햇빛이 운동장 위에서 반짝이던 계절이었다.
아침 공기에는 아직 봄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고,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교실 창문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조심스럽게 스며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여전히 성실한 부반장이었다.
하지만 집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고,
마음을 붙일 곳은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 무렵,
운동회나 소풍이 있는 날이면
부모들이 선생님께 드릴 도시락과 음료를
준비해 보내던 때였다.


개나리가 지고
녹음이 짙어지던
봄의 한가운데였다.


형편이 넉넉한 집들 사이에서는
일본식 마우병에
미국식 냉커피를 담아 보내는 풍습이
새로운 멋처럼 번지고 있었다.


얼음을 가득 채운 보온병에서
은근한 커피 향이
조용히 새어 나오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우리 집에는
보온병도,
커피도 없었다.


커피는
우리 삶과는 닿아 있지 않은
다른 세계의 음료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담임 선생님께 말했다.


“선생님,
저희 집은
그걸 준비하기가 어려워요.”


선생님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갔다.
그리고 내 손에 보온병을 쥐여주며 말했다.


“여기 커피만 타서 넣어오면 돼.
부반장인데 이 정도는 준비해야지?”


가벼운 말처럼 들렸지만
그 말은 어린 나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게로 내려앉았다.


그 순간,
나는 불편했다.


억지로 꿰맞춘 듯한 어색함,
설명할 수 없는 미안함과 슬픔,
그리고 처음 느껴본
낯선 자존심이
작은 가슴 안쪽에서
천천히 차올랐다.


집에 돌아와 사정을 말하자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커피 한 병을 사 오셨다.


우리 형편에서는
적지 않은 지출이었지만
엄마는 그 무게를
말로 옮기지 않으셨다.


다음 날 새벽,
엄마는 얼음을 사 와
조용히 냉커피를 타 주셨다.


“선생님께 드리고,
운동회 재미있게 하고 와.”


나는
보온병을 들고
학교로 향했다.


하지만 그날의 마음은
냉커피보다
더 차가웠다.


그날 이후
나는 조용히 결심했다.


다시는
학급 임원에
나서지 않겠다고.


남들에게는 가벼운 일이
어떤 아이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배웠다.

스크린샷 2026-01-25 143147.png "소풍날마다 같았던 노란 단무지 김밥."

소풍날이면
내 도시락은 늘 같았다.


노란 단무지 한 줄이 선명한 김밥.
남대문 새벽시장에서
엄마가 사 오시던
값싼 김밥이었다.


아이들 앞에서
도시락을 펼칠 때면
얼굴이 붉어졌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우리 가족이 마련할 수 있는
가장 성실한 한 끼였다.


엄마는 늘 버거워 보였고,
나는 어린 나이에
두 동생을 챙겼다.


세상은
열 살짜리에게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무거웠다.


그즈음
나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는
이 상황에서
벗어나겠다고.


공부든, 운동이든,
무엇이든
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파고들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열심히’라기보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에 가까웠다.


그 시절의 머쓱함과 부끄러움은
나를 기죽인 기억이 아니라
내 안의 자존을
깨운 씨앗이었다.


냉커피 한 병이 감당되지 않아
마음을 접어야 했던 그 순간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 기억들은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린 시절의 부끄러움 속에는
언제나
‘나를 존중하는 힘’이
숨어 있었다.


지금도
내 안 어딘가에는
그날의 열 살이 남아 있다.


말없이,
끝까지 버틴 얼굴로.

✍️ 작가 노트

이 글은 1974년 초등학교 시절, 아주 사소해 보이는 하루의 기억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그 의미를 온전히 알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 돌아보니 그날의 경험은 제 삶의 태도를 조용히 바꾸어 놓은 순간이었습니다.


운동회 준비 과정에서 겪은 작은 사건은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기준을 마음속에 세우게 한 첫 계기였습니다.
그날 저는 제 처지를 핑계로 저 자신을 낮추지 않겠다고,
설명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스스로에게만큼은 떳떳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의 부끄러움과 머쓱함은 저를 위축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제가 저 자신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하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택은
이후의 삶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한 약속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날의 다짐 위에 서 있습니다.
눈에 띄지 않고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그 결심은 오랜 시간 제 삶을 떠받치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어떤 아이에게는 아주 사소한 하루가
평생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다짐들이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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