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그 남자의 이야기

by Big Green

2.



남자는 바보처럼 입을 반쯤 벌리고 아무 대답도 하지않았다. 여자는 톡톡 테이블을 손 끝으로 두드린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요, 우경씨."


우경은 입을 조금 더 벌려 무언가 말하려 하지만 당황과 기시감으로 말더듬이 같은 소리만 기어나올 뿐 제대로 된 문장은 만들 수 없었다.


"일주일이 아니에요. 나는 그보다 더 오래 우경씨를 알았어요."


여자는 다시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더니 고개를 돌려 우경으로부터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우경씨도 한참 봤죠. 일하는 걸 일주일이나 봤더니 이제 좀 지겨워졌어."


우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나가주세요."


그 말에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너무 무서워하지말아요."


우경은 떨고 있었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않은지 조금 되었다. 서있는 것도 힘이 부친다고 생각할 때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커피가 남은 잔을 카운터에 올렸다.


"내일도 올게요."


여자는 다음 날부터 창가가 아닌 홀중앙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는 사이처럼 들어올 때 다정하게 인사를 하고 또 에스프레소 한잔을 시켜 앉는다. 웃으며 턱을 괴고 이제는 우경을 보았다. 우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일을 하러 움직이면서 발걸음을 셌다. 입구에서 카운터 안쪽까지 열세발자국.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손 안에 땀이 꽉 차 흐르려는 것을 바지 뒷주머니에 문질러 닦고 우경은 자리에 앉아 부러 창 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오늘, 문 닫을게요.”


여자는 환하게 웃었다. 쟁반을 들고 카운터로 다가온 여자는 메마른 눈으로 무언가 말하려 입술을 달싹이다 말아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날 너무 불편해하지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는 30일만 여기에 올거고 그동안 우경씨랑 잘지냈으면 하니까요. 사실 그 사이에 우경씨가 내 이름을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도원이에요. 양도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도원은 우경의 반응을 한참 기다렸지만 우경은 그 자리에 꼿꼿히 서서 주먹을 움켜쥐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심장은 이제 얼마나 빨리 뛰는지도 알 수 없었고 현기증이 나 눈앞에 보였다 보이지않았다 하는 지경으로 우경은 땀이 찬 손도 닦을 수가 없어 여자와 시선을 맞추지도 못하고 애꿎은 커피잔을 노려보았다.


“알겠어요. 너무 신경쓰지말아요. 제 욕심이니까. 갈게요.”


딸랑. 종소리의 잔향이 하염없이 가게 안을 맴돌았다.


우경은 그날 과거의 꿈을 꾸었다. 회색빛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중년의 남성과 블록을 가지고 노는 꿈. 손끝과 발끝이 시렸고 온몸이 떨리고 추워 이불을 동여매도 어쩐지 그리워지는 순간의 꿈이 목을 졸랐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차가운 쇠막대를 입안에 넣어 입을 벌리고 눈에 찌르는 듯한 빛을 비추던 순간들을 화질 나쁜 브라운관 티비를 멀뚱히 보는 것처럼 관망하는 기분나쁜 꿈 속에서 마침내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따뜻하게 웃었다.


식은땀에 흠뻑 젖어 일어난 우경은 창밖을 보았다. 집 어디에도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창밖의 어스름으로 얼추 시간을 예상한다. 날은 밝았고 아마 아침일 것이라고, 꿈에 취한 우경은 식은땀으로 축축한 잠옷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바스락대는 이불을 감싸 덮었다. 오늘은 일어나고 싶지않았다. 꿈자리가 나빴고 가게는 열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도.


“…올텐데.”


문득 도원의 생각이 났다. 30일동안 오겠다는 당돌한 말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여자의 웃음이 눈에 자꾸만 걸렸다. 우경은 몸을 말며 이불을 조금 더 꼭 쥐었다.


“분명 올텐데.”


몸을 한참동안 뒤척이던 우경은 결국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맨발에 닿는 돌바닥이 차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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