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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빅이슈코리아 Sep 23. 2021

[사물과 사람] 생명나무

아이의 눈에도 옷이 너무 남루했나 보다. 이제 곧 대학 기숙사에 같이 가게 될 ‘미스터 피클’에게 새 옷을 입히고 싶어 했다. (피클 씨는 아기 때부터 함께 산 토끼 모양의 봉제 인형이다.) 내게 옷 만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했다.

멜빵 치마

애린이는 옷장을 뒤지더니 데님 멜빵 치마를 꺼냈다. 한국에서 살 때 입었던 것이니 6~7년은 족히 되었지만, 아직 새 옷 같다. “엄마, 이걸로 만들자.” “이거 이제 안 입어?” 나는 낡은 옷을 뒤적이면서 물었다. “응, 안 입어.” ‘멀쩡한’ 옷을 잘라서 인형 옷을 만드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러기로 했다. 피클이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천을 아낀다고 내가 처음부터 허름한 옷을 재활용하지 않았으면 지금 저렇게까지 누더기가 되지는 않았을 거다.

이 치마를 입고 찍은 사진이 있다.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GCSE 미술 작품 전시회를 할 때였다.(GCSE는 영국의 중학교 졸업시험으로 ‘중등교육일반자격증’의 약자다. 영어, 수학, 과학은 필수과목이고 나머지는 선택한다.) 미술 시험은 이틀에 걸쳐 열 시간 동안 봤다. 미리 공고한 주제에 대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서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다. 2018년 미술 시험 주제는 ‘조각남(fragmentation)’이었다. 애린이는 자연의 파괴를 표현하고 싶어서 뱃속 가득 쓰레기를 담고 기름을 뒤집어쓴 바닷새를 만들었다. 재료를 구한다고 아빠와 같이 바닷가에 나가 쓰레기를 줍고, 재활용 쓰레기장을 뒤져서 녹슨 철, 깃털, 전선, 나사, 못, 단추, 맥도날드 ‘해피밀’ 풍선 쪼가리를 찾았다. 흘러내리는 원유는 양초를 녹여서 표현하고 싶어 했다. 여느 양초여도 상관없을 텐데, 나는 애린이가 아기 때 세례식에서 썼던 초를 녹여서 병에 담고, 캔들 워머를 챙겨주었다. 시험 보는 아이를 위해서라면 다양한 형태로 기도할 수 있다. 시험장에 엿을 붙이는 엄마들의 심정도 비슷할 거다.


인형 옷과 가방

천이 두꺼워서 손바느질에 애를 먹는 애린이를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뭘 하나 만들고 싶어졌다. 첫아이이자, 친구이자, 애인이자, 나의 가장 좋은 선생님이었던 애린이가 둥지를 떠나간다. 상실을 위로할 기념품이 필요했다. 내가 늘 지닐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주섬주섬 자투리 천을 챙겨서 가방 본을 떴다. 치마 주머니를 살리면 가방에 앞주머니도 달 수 있겠다. 아이와 나란히 앉아서 밤늦게까지 바느질을 했다. 이제 눈이 어두워진 나는 바늘에 실을 꿰는 것을 자꾸 애린에게 부탁했다. 마침내 멜빵 치마는 피클의 바지와 나의 가방으로 거듭났다. 가방 앞이 허전해서 장식으로 달 물건이 있을까 서랍을 뒤지다가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를 봤다. 아, 이게 좋겠다.

일전에 ‘마리퀴리재단’에 노란 수선화 배지를 주문한 적이 있다.(마리퀴리는 말기암환자를 위한 재가호스피스지원사업을 하는 자선단체이다. 수선화는 마리퀴리재단의 상징이다.) 배지 값으로 아주 헐한 돈을 기부했는데, 얼마 후에 그 돈에 몇 배는 될 법한 선물 꾸러미가 왔다. ‘생명의 나무’는 그 꾸러미에 있었던 작은 금속

장식이었다.

생명나무는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세계 여러 곳의 종교와 신화에는 살아 있는 존재들을 근원에서 서로 연결하는 신성목(sacred tree), 혹은 우주의 중심과 닿아 있는 세계수 이야기가 흔히 나온다. 우리 문화에서는 마을 어귀에 있는 ‘당산목’이 생명나무일거다. 마리 퀴리 생명나무가 붙어 있는 명함 크기의 작은 종이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크고 자랑스럽게 서거라(Stand tall and proud),
가지를 쭉 뻗어라(branch out on a limb),
그러나 너의 뿌리를 잊지는 마라(but never forget your root


나에게 생명나무는, 이 세상에 뿌리내리고 살려고 애쓰는 여린 목숨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생명 에너지 같은 것이다. 이제 세상에 나가 혼자 살게 될 아이 곁에 그 기운이 함께하면 좋겠다. 가방에 붙였던 생명나무를 떼서 피클이 입은 옷에 실로 단단히 달아주었다. 토끼의 단전에 생명 에너지 연료봉을 장착해두었으니, 그 곁에 있는 애린이는 덜 외롭고 덜 고단할 거다.


개나리

내게도 생명나무가 있다. 개나리다. 지난봄에, 꽃이 고작 서너 개 피어 있고 이파리도 빈약한 묘목을 사서 마당에 심었다. 봄이 되면 늘 어린 꽃나무 화분을 사곤 했지만, 마당 흙에 심은 것은 이게 처음이었다. 나는 좀처럼 생명을 땅에 심지 않았다. 마음 한 켠에 늘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무가 뿌리내리고 자라는 것을 내가 긴 세월 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땅에 심었는데 시름시름 시들면, 내 처지를 투사하면서 슬퍼질까 봐 지레 화분에서 꺼내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개나리여서 심었다. 내가 마음 붙일 수 있게 울타리가

되어줄 것 같았다. 엄마 때문이다.

어릴 적에 살았던 수색 집 마당 한구석에 개나리 나무가 있었다. 마당이래야 손바닥만 했으니 그 한 켠에 있던 나무가 얼마나 컸으랴마는, 기억 속에 있는 그 나무는 그 뒤에 숨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만큼 크고 빽빽했다.

꽃이 피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달달하고 따뜻한 냄새가 났다. 지금도 개나리 향을 맡으면 머릿속에 아지랑이가 핀다. 내 가장 오래된 기억은 엄마가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가지에 걸고 그 아래에서 음악을 듣는 모습이다. 그런 여유는 일을 하면서 아이 넷을 (거의) 혼자 키웠던 엄마가 자주 누렸던 호사가 아니었을 텐데, 한복을 입고 노란 꽃 아래 앉아 있던 그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곱다. 그래서 내게 개나리는 엄마의 나무가 되었다.

땅에 심은 개나리는 다행히 죽지 않고 여름 한철 동안 쑥쑥 자랐다. 키는 두 배로 자랐고 팔 벌린 가지는 세 배로 커졌다. 물을 주면서 말을 걸었다.

“너는 크고 자랑스럽게 자라거라. 가지를 쭉쭉 뻗거라.
나의 뿌리는 내가 잊지 않을 테니.”



글 | 사진제공. 이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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