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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ory of
Future Writers

by 권냥이 Sep 04. 2022

회사원, 프리랜서 디자이너, 그리고 작가

보수서점 (2021. 9) -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아주 오래전부터 책을 쓰고 싶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책 한 권쯤 남기고 가고 싶었다.

처음엔 어떤 방식으로든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글은 알면 알수록 모르겠고, 쓰면 쓸수록 잘 쓰고 싶어 진다.




나의 첫 투고는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다녀왔는데, 스마트폰도 없었던 (와- 옛날 사람) 시절인지라 한 권의 노트에 매일 순례길 여정을 기록했었다.

다녀온 후 개인 블로그에 노트의 내용을 토대로 40일간의 여정을 연재했고, 그 글은 블로그 메인에도 여러 번 소개되고, 나름 괜찮은 호응을 얻었다. 용기를 얻은 나는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제대로 된 투고의 방법을 몰랐다. 출간 기획서를 만들어서 보낸 것이 아닌 내 블로그 링크를 보내고 대강의 소개글을 덧붙여서 보냈다. 내 딴엔 신경 써서 보낸다고 보낸 것이 킬포.

내 글이 마음에 든다면 어떻게든 편집자가 알아봐 주겠지 하며 말도 안 되는 패기를 가졌다. 호기롭게도.

당연히 성의 없는 투고에 답변은 오지 않았고, 단 한 번의 투고 실패 후 나는 그대로 포기를 했다.


나는 당시 웹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고, 늘 정신이 없었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하고 싶었지만 내 그릇은 크지 않았고 용기도 없었다. 나의 출간에 대한 꿈은 그냥 고이 접어서 깊숙한 곳에 처박아둔 채로 여러 해가 흘렀다.

몇 번의 퇴사와 입사를 거친 약 7년간의 직장생활은 어떤 악덕 사장을 계기로 완전히 끝나게 되었다. 새롭게 시작된 사업부에 나는 총괄 마케팅을 담당하며 입사했다. 작은 회사였기에 쇼핑몰 운영부터 전화응대 패키지 제품 디자인까지 만능으로 해야 했고 늘 정신이 없었다. 몇 달이 지나고 예상만큼의 실적이 오르지 않자 딸뻘인 나를 놓고 전체 회식 자리에서 엄청난 면박을 주셨다. 그 식당에 CCTV가 있었을까? 나는 왜 그때 녹음할 생각을 못했을까? 서른한 살의 나는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고 나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족 같은 회사는 가’족’같았다. 그 자리에 있던 실장님이라고 불리던 사장의 와이프는 그 사장의 폭언이 끝나기만을 덜덜 떨면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술에 취해서 난데없이 나에게 폭언을 퍼붓던 사장이 나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 담긴 사과가 아니였다.

‘그래서 너 뭐가 불만인데?’ 였다.  

그때 알았다.

자신의 신생사업계획이 잘못되었음이 자신의 탓이 아니었음을, 책임 전가를 할 사람이 필요했구나.

나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일방적으로 당했던 나에게 실장이라는 사람은 실업급여도 신청해줄 수 없다고 했다. 어쨌든 내 손으로 낸 사직서니까. 그리고 사장 (혹은 남편)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까.

그게 나의 마지막 회사 이야기다.

회사를 나오며 난 바보 같게도 그들을 탓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원망하는 마음을 가졌다.

내가 유연하지 못해서 부러진 것이라고, 나의 탓을 했다.




나는 혼자 일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눈치도 보이고 일도 제대로 안될 것 같았다. 출퇴근할 곳이 필요했다.

사양 좋은 조립식 컴퓨터를 구입한 후,  남 자취방의 남는 방 하나를 작업실로 꾸몄다.

남친이 출근을 하면 나도 그 빈집으로 출근을 했다. 마음먹고 일을 시작했을 시기가 한겨울이었기에 언덕에 위치했던 다세대주택 1층의 남친 집 아니 사무실은 몹시도 추웠다. 수도는 한파에 종종 얼곤 했지만 보일러를 맘껏 틀기도 미안했다. 그렇게 집과 사무실을 두 달쯤 왕복하며 살았을 때 즈음 드디어 받던 월급보다 프리랜서로 버는 수입이 많아졌고, 곧 월급의 배를 넘게 버는 달들이 이어졌다.

내 이름 걸고 하는 일, 내가 일한 만큼 온전히 내가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가짐도 달랐다.

하루 종일 컴퓨터를 하며 생긴 두통도 덤으로 이어졌지만, 나는 이렇게 혼자 일하는 게 맞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몇 개월 후, 회사로부터 다시 와줄 수 없냐는 연락을 받았고, 이미 나는 월급보다 많이 벌고 있었기에 다시 그곳으로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물론 돈이 궁했어도 그 회사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이게 벌써 10년이 다 된 이야기다.

나는 그렇게 프리랜서로 1년쯤 일하다가 자신의 집 방한칸을 사무실로 내어준 남친과 결혼을 했다.

월급보다 많았던 프리랜서 때의 수입은 결혼 후 바로 이어진 임신, 출산, 육아의 과정에서 점점 줄어들어서 아예 수입이 없었던 기간도 있었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가도 또다시 둘째 출산이 이어지며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도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기간 동안 참 많은 인연들을 만났다. 다양한 자영업자분들을 만났고 그 소중한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엄마'가 아닌 '나'를 잃지 않게 해 주었던 감사한 사람들이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의뢰를 받아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지만, 아이를 키우며 남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하는 수입은 많지 않았다. 일을 늘리고 싶어도 내 체력도,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둘째까지 어린이집에 가게 되면서 조금씩 시간이 나기 시작하면서 마음속에 품고 있던 꿈을 다시 꾸게 되었다.  


다들 이번 생에 이루고픈 꿈 하나 갖고 있지 않나?

궁극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것은 작가였다.

내 책을 내는 것, 내 그림이 사랑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떤 주제로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할지를 몰랐다. 육아가 일상인 내 삶은 재미난 이야깃거리도 없었고 평탄했고 평범했다. 계속 그리다 보니 내 그림 스타일이 생겼지만 스토리적인 면이 부족했다.

그렇게 또 한동안 묵혀두었던 꿈이 꿈으로 끝날 뻔하던 중 독립서점을 알게 되었고, 나만의 느낌으로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독립서점'에서 나의 길을 묻게 되었다.

나, 계속 이 길을 가도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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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서점을 그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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