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깊은 이야기를 하자면, 동생을 떠나보낸 뒤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반긴다. 고통을 오래 겪는 일은 싫지만 아픔과 상처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일이라면 차라리 병원에 가지 않고 그 아픔을 견뎌서 더 큰 병을 만드는 게 낫다는 기묘한 생각을 할 만큼 가치관이 굳건하다. 덩달아 병원에 가는 횟수도 눈에 띄게 줄었다. 너무 아프면 약국에서 파는 진통제 한 알을 먹고 잠에 들고, 마지막으로 건강 검진을 받은 게 몇 년 전이다. 어느 날 갑자기 건강 검진에서 큰 병을 발견해 시한부 판정을 받으면 좋겠다는 실없는 농담을 스스로 할 만큼 건강 관리를 잘하지 않는다. 영양제는 가끔 먹지만, 체력이나 지구력을 기르는 운동은 당연히 뒷전이고 시간을 내어 병원을 가서 치료를 받는 일은 거의 없다.
애인 '건'은 다르다. 병원을 '생활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주는 서비스'라고 생각하면서 아플 때 재깍재깍 병원에 간다. 콧물이 흐르면 이비인후과로, 두통이 심하면 신경외과로, 어깨가 아프면 정형외과로 가서 물리치료까지 꼬박꼬박 받는 건이 나는 신기했다. 건은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걸, 병원에서 처방하는 약을 먹고 치료만 받으면 훨씬 내일이 윤택해질 수 있다며 내게 병원을 권했지만 나는 그때마다 강경하게 싫다고 답했다. 옷을 사는 돈은 아깝지 않지만, 이상하게 병원에 쓰는 비용은 아깝다. 건강 보험이 적용되어서 훨씬 저렴해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다. 네 개나 묻혀 있는 매복 사랑니도 뺄 생각이 전혀 없다. 잠을 잘 때 코골이를 심하게 해도 수면무호흡증을 의심하며 수면다원검사를 받지 않는다.
건은 내 증상을 보거나 들으면 바로 스마트폰을 열어 원인을 찾는다. 밤에 잠을 잘 잤는데도 땀을 많이 흘린 것 때문인지 여름만 되면 낮이고 아침이고 잠이 쏟아진다는 내 얘기를 들으면, 일사병을 의심하려 어디선가 '열피로'라는 질환명을 찾아낸다. 땀을 잔뜩 흘리고도 물 대신 커피를 마시는 내 습관을 확인하고, 커피 대신 이온음료나 물을 꼭 마시기를 권한다. 월경을 세 달 동안 하지 않아도 산부인과를 가지 않는 내게 월경을 정기적으로 할 수 있는 건강한 습관을 읊는다.
물론 가끔은 잔소리처럼 느껴지지만, 어차피 병원에 가지 않을 예정이고 습관을 바로 적용하지도 않겠지만 알겠다고 답한다. 그런 내가 언젠가부터 병원을 다닌다. 연차를 내고 병원에 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푹 자기 위해 제 발로 이비인후과를 걸어가 수면무호흡증을 의심하며 수면다원검사를 받는다. 속이 쓰리지 않은데 날짜를 잡고 내시경을 받는다. 용종을 없애고 난 뒤에는 의사의 말에 따라 죽을 먹는다. 정형외과에 가서는 거북목을 발견했다. 다음 주에는 비싼 도수 치료를 받는다. 산부인과에서 다낭성난소증후군 치료도 정기적으로 받는다. 하루마다 꼬박꼬박 정해진 시각에 약을 삼킨다. 불편하지만 싫지는 않다.
감기에 걸려 콧물이 턱까지 흘러 마스크로 가린 채 병원에 가지 않고 버티는 내가 갑자기 몸 이곳저곳을 챙기는 게 신기해서 언제부터인지 가늠을 해봤다. 건이 병원을 권유해서는 아니었다. 백 년 뒤의 미래가 궁금하다고, 과학 기술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상상조차 안 된다며 백 살 하고도 이십 년을 더 살고 싶어 하는 건의 삶에 대한 애착이 나를 병원으로 이끌었다. 아픔을 예방하고, 병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에 대한 갈망으로부터 멀어진다. 튼튼하게 살고 싶고 건과 함께 몇십 년 뒤를 맞이하고 싶다. 신문물을 꾸준히 발견하며 경탄하고 싶다. 좋은 사람이 있으면 좋은 사람 곁에 오래 머물고 싶어 진다는 걸 건을 보고 배웠다. 사람을 신뢰하지 않고 정을 주지 않으니 내가 떠나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라는 당연한 법칙이 점점 허물어졌다. 그러려면 우선 건강부터 챙겨야 하니 여러 병원을 다닌다.
고등학생 시절, 아무리 아파도 사람의 몸은 자연 치유 기능이 있다며 아득바득 병원에 가지 않는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그때는 선생님을 이상하게 쳐다봤지만 언젠가부터 나도 그 선생님처럼 병원을 멀리했다. 만일 내 주변에도 나 모르게 병원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차피 이 정도 아픔은 병원에 가지 않고도 치료받을 수 있고 예방은 검진 대신 운동으로 하면 되지 않냐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병원에 가기를 권하기보다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와 함께 오랫동안 살고 싶다고. 백 년 뒤까지, 운이 좋으면 이백 년 뒤까지 추억을 쌓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니 건강 검진을 받자고. 내시경도 받고, 치아도 구석구석 살피고, 거북목이나 디스크로 아프기 전에 척추 상태를 미리 확인하자고 말이다.
후일담
체력을 키우기 위해 하루 한 번 운동을 하자며 오늘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날 야외 데이트를 할 때에도 덜 지칠 수 있도록 지구력을 키우고 싶다. 지하철에서도 에스컬레이터 줄을 기다리지 않고 높은 계단을 성큼성큼 오르고 싶다. 하루를 더 온전하게 맞이하고 싶다. 잠을 자면 일주일이 흘렀으면 좋겠다고, 일 년이 지났으면 좋겠다고 상상하던 나는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해상도를 높여 보다 하루를 즐기고 싶다. 영화 어바웃 타임처럼, 하루를 두 번 만끽하는 사람만큼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