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뀔 수 있을까?
“일어나. 내가 학교 가니? 네가 가지? 어휴”
“엄마 없으면 넌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학교는 가겠니?"
똑같은 말을 수년동안 하다 보면
이 이야기는 어느 날 잔소리라고 명명되어 있고
그 어느 날에는 어두운 감정과 함께 안 해도 될 말들로 투박하게 포장되어 입으로 실려 나온다.
처음부터 이러하진 않았다.
다섯 살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녔을 때,
아이의 포동포동하고 보드라운 뺨에 뽀뽀를 해주며 자는 아이를 깨웠던 적도 있다.
안 일어나면 으스러지게 안아주고 또 뽀뽀하면서 깨웠다.
내 허리춤까지 닿는 키 작은 아이가 어린이집 등원을 하는 것 자체가 기특했다.
눈 뜨기 힘들어하던 그 작은 아이를 소중하게 깨우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간에 더 자고 싶어 하는 아이를 깨우기 위해서 나 또한 애쓰던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수년이 지나면 혼자 일어날 만도 하지 않나?
십 년이 지나 엄마 머리를 훌쩍 넘어 훤칠해 질대로 훤칠해진 아이는
다섯 살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나는 게 힘들기만 하다.
학교에 가야 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는데 아이는 이불속이 좋은가보다.
나는 십여 년 넘게 달리기를 해오고 있다.
지금처럼 달리기 강습이 없던 과거에는 내 몸 편한 대로 달렸다.
어느 순간 올바른 자세로 달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 러닝 강습을 받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고수하던 자세를 바꾸려니 참 어려웠다.
나의 올바르지 않은 자세는 달릴 때마다 감독님께서 피드백을 해주신다.
그 피드백을 받고 한 주간 달리면서 고치려고 애를 써본다.
삼 년 넘게 같은 소리를 듣는 거 같은데
나의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부위의 자세를 고치는데 일여 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도 의식적으로 생각해야 고쳐지고
달릴 때 그 자세를 생각을 하지 않으면 그 순간부터 자세는 흐트러지고 만다.
지난 시간 러닝 교정 피드백을 받으며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잔소리가 꼭 달리기 강습 피드백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같은 말을 매일, 매년하고 있는데
상대방의 의지가 없으니 고쳐지지 않는구나란 생각이 문득 들은 것이다.
'아들의 의지가 없으면 내가 백날 이야기 해도 이 습관은 고쳐지지 않겠구나.'
월요일,
학교 갈 준비하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들은 같은 일상의 반복일 텐데
혹여 학교에 늦게 가게 되면
어떠한 계기가 생겨서
본인의 필요에 의해 학교에 일찍이 가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 옆에서 말해줘도
본인이 고칠 생각이 없으면
고쳐지지 않겠단 생각을 했던 것이다.
아들에게 일찍 나가는 습관을 길러주고 싶은데
그것은 엄마의 바람일 뿐이다.
이 또한 깨닭은 것은 본인의 몫이고
실행하는 것도 본인의 몫인 것이다.
일찍 깨닫길 바라야지.
아직 어리니깐.
나의 달리기는 의식적으로 365일 달려도
일 년 안에 고쳐질까 말까 하는데
고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아이에게
똑같은 소리를 한다고 한들
이것이 고쳐질까? 의문이다.
곧 아이와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