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헤세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겨준 과제
지난주 <데미안>에 이어서 이번 주도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만났다. 헤세의 또 하나의 대표작인 <수레바퀴 아래서>다. 사실 중학교 때 <데미안>과 함께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데미안>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지만 <수레바퀴 아래서>는 결말을 보고 충격을 받았었다. 당시에는 자살이 지금처럼 흔한 사건이 아니었고 어린 나이에 주인공의 비극적인 결말이 낯설어서였을까. 그래서인지 청소년기에 읽었던 책 중에 이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데미안>과 비슷하게 <수레바퀴 아래서>도 헤세 혹은 우리의 내면 아이와 만날 수 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독일의 소도시 슈바벤 지역에서 가장 똑똑한 아이로 주시험에 합격하여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한다. 낚시나 토끼 돌보기 등 좋아하는 일을 멀리하고 친구들과 교류도 없이 교장과 목사에게 개인 수업을 받으며 공부에 매진한 결과로 신학교에 2등으로 합격한다. 시험에 합격한 후 방학 동안에도 신학교에서 공부할 내용을 선행학습한다.
한스는 신학교에 입학한 후 열심히 공부하는 모범생의 길을 걷던 중에 룸메이트 중 한 명이었던 힌딩거의 죽음을 목격한다. 이로 인해 관계가 소원해졌던 괴짜 친구 헤르만 하일너와 다시 가까워지면서 점점 학교와 멀어진다. 성적이 떨어지자 교장 선생님이 한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무튼 지치면 안 되네.
그렇지 않으면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 테니까.
교장은 헤르만에게 한스 접근 금지령을 내린다. 교장의 명령을 어긴 헤르만은 감금형을 받자 학교에서 도망친다. 이 사건으로 헤르만은 퇴학 처분을 받고 한스와 이별한다. 이러한 일들로 한스의 학교 생활은 무너져가고 의사는 한스가 요양을 위해서 학교를 쉬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온 한스는 과일주스를 만들면서 만난 에마라는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그녀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다. 한스는 아버지의 권유로 기계공으로 살아가기 위해 수습공으로 일하며 새로운 일에 호기심을 느끼지만 육체적으로 금세 지쳐버린다. 일급 수습공이었던 친구 아우구스트와 함께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살인지 사고인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한스의 시신이 강물에서 발견된다.
허무한 한스의 삶을 보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되짚어 보았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의 관심에 의해 당시 출세가 보장된 신학교에 간 것이 잘못된 것인지, 신학교에서 헤르만 하일너라는 문제아 친구를 만난 것이 원인인 건지, 사회의 유용한 일원으로 만들기에만 집중했던 교장의 태도가 문제인 건지,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사라져 버린 에마의 탓인 건지, 원하지도 않은 기계공으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권유 때문인 건지.... 문제점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모아 보니 이 모든 것이 한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된 일이었다.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개인의 정신적 성장을 이끄는 셀프가 없이 이리저리 이끌려 다니는 삶이었기에 버텨내기가 버거웠을 것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20세기 독일의 교육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성공이 보장된 학과와 명문 대학을 가기 위해 주말도 없이 방학도 없이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한스와 다른 점이 없다. 경쟁에서 승리하여 수레바퀴 안에 들어온 아이들만이 사회의 유용한 인재로 대우하는 학교와 우리 사회 분위기도 소설과 다르지 않다. 나 역시 아이들에게 경쟁에서 살아남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책해 본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평소에 한스를 안쓰럽게 여기던 구둣방 주인 플라이크는 한스의 장례식에 온 교장과 교사들과 목사들을 보고 한스가 그 지경이 되는 걸 도와준 사람들이라고 하며 어쩌면 우리도 그 아이한테 소홀했다고 말한다. 독서 모임의 한 선배님은 한스를 살리기 위해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이 될 것이다. 20세기 헤세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과제를 안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