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케ㅡㄹ링

검진은 킹받아

by 이븐도




일 년에 한 번. 스케-링 하세요 그제 제일로 중요합니다이 그리고 자기 전에 양치 있죠 만약 양치하는 걸 잊고 자면 어때요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찝찝하죠 그겁니다 그거예요 아주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좋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스케-링 하세요 양치 꼭 하시고 자기 전에.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아주 깨끗하네요 좋아요 안녕히 가시고.



양치를 잊는 사람이 어딨어요.

그냥 하기 싫어서 빼먹는 거죠, 너무 대하시네.

동네 치과에서는 6개월에 한 번 오랬는데. 나 그 때 3월인가 다시 치과 갔어야 했는데. 반 년 전에 해리포터 케이크 먹고 6월에 다시 스케일링 하러 가려 했는데. 무서워서 가능한 한껏 회피 중이었는데. 칭찬에 약한 나는 조만간 다시 스케일링을 가기로 한다. 이게 검진의 순기능인가?

아니야. 이건 그냥 이 할아버지를 만나서 운이 좋았던 거야. 김봉기 치과의사 선생님.






검진은 항상 킹받는 일이었다. 병동에서도 뚝딱 다 해버릴 수 있는 것들. 그러나?구태여 이브닝 전에 일찍 오거나 오프 때 병원으로 향하거나 나이트가 끝난 후 졸음과 세상에 대한 증오를 참으며 그 통로 아닌 통로의 세련되고 희부연 공기 속에 대기하는 시간. 내 노동환경이 이렇게 폼나게 생긴 곳이었나 싶은 괴리감. 구두는 종이가방에 넣고 반스 신은 발로 거길 달렸던 면접 때는 그런 세련된 공기를 입는 직장인이 될 줄 알았지. 아니야. 알았나? ?

아니야. 틀렸다. 나는 그 때도 알고 있었다. 이 '뽕 찬' 기분으로 거길 걸을 수 있는 건 최종합격 후 신체검진을 하던 9월 그 날이 유일할 거라는 걸.



환자보다는 진짜 병원에서 일하는 각색의 사람들이 그 큰 통로를 걷는다. 의사들의 하얀 자켓. 사복을 입은 나. 가끔 익숙한 얼굴. 사원들의 핑크색 유니폼. 제약회사 또는 연구 쪽 직원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는 그들의 연보라색 사원증. 가끔 외국인. 빨라쪼 커피 컵. 임상병리사들의 긴 가운. 잔뜩 다 구겨진 스크럽복. 크록스. 볼펜. 진짜 병원 직원 같은 차림새의 사람들 사이에 그냥 일반 직장인 같은 사람들.


모든 노동자들이 여기서 만나는 느낌이다. 워킹갤러리, 보다는 워킹- 휴먼- 갤러리가 어울리겠어. 이름만큼이나 폼나고 쾌적하다. 여기 에어컨 돌릴 돈으로 혈압기나 하나 더 사 줬으면.. 이라고 생각했다. 외주 검진 센터 사람들의 책상에 있는 깨끗고 멀쩡한 혈압를 보면서. 근데 가만 보니 그건 병원 소관이라기보단 그냥 우리가 일하는 양상에는 관심이 전무하신 수선생님의 행보에 달린 거라서, 어쩔 수 없군.




님 교대 근무 한 지 몇 년? 3년. 아, 3년밖에 안 됐어? 여길 다닌지 그거밖에 안 됐다고? 사실 3년 아닌데. 거의 4년인데. 근데 직장 이름이랑 기간 또 입력하기 귀찮아서 그냥 넘긴다. 그게 그거. 검진이 제일 귀찮아요. 중간에 소변 받으러 또 화장실도 갔다 와야 되잖아요. 거기 끝까지 걸어갔다가 또 와야 된다구요. 개귀찮아, 했더니 프셉은. 뭐? 너 바보냐, 진짜? 야. 병동에서 유린컵 하나 가져가서 담아오면 되지. 너 지금까지 그렇게 했어? 아.


어제는 진짜 술을 한 잔 하고 싶었다. 너무 많이 울어서. 금식보다는 그게 더 문제였다. 아. 간수치? 높게 나오든가 말든가. 새벽에 한 잔 마신다고 그렇게 맛 갈 간이었으면 벌써 갔지 싶긴 했는데 만약 재검 뜨면 이 짓을 또 해야 한다. 몹시 귀찮다는 말이다. 그럴 수는 없지. 내 오프는 소중해. 그래서 술 참았다. 그렇다고 내가 부어라 마셔라 하는 사람도 아닌데 그냥 잤다.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이 정도면 굴복인가? 병원에서 받은 상처, 그 방향으로 오줌도 안 싼다는 그 흔해빠진 농담이 이해되는 외로운 밤이었는데. 또 하라는 거 하라고 착실하게 시간 맞춰서 왔다고. 에휴. 돈 벌어야지. 씨.




문진, 또 문진. 피 뽑을 검체통 받고. 맨날 병동에서 뽑고 내리기만 하던 게 저렇게 한꺼번에 정갈하게 모여 있는 걸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나도 임상병리학과에 갔으면 어땠을까. 근데 취직 진짜 빡세다고 했다. 박봉이고, 다 계약직이고. 아닐 수도 있지만 들은 바로는 그랬다.

그럼 그 사람들은 하루종일 병에 든 피랑 소변통만 보나? 여기 진검실 인간들은 대체로 다 싸가지가 없는데. 아니. 그럼 싹수가 있어야 하는 거잖아. 대학병원 검사실이면 사람들 응대할 일도 없는 거 아니냐고. 대체 왜? 이 사람들은 계속계속 마주치겠지만.


아무튼. 그 뭉터기의 벨에는 중간중간 내가 아는 이름들도 보였다. 인간은 다 똑같구나. 피. 소변. 분리된 혈청. 또 피. 피검사. 시력검사. 헤드폰 끼고 버튼 누르기. 그리고 치과. 김봉기 선생님. 전국노래자랑을 오래오래 진행하셨던 그 분을 연상케 하는 연배였다. 스케일링을 스케-링으로 발음했다. 아주 좋아요.




좋아요? 글쎄. 저 치과 갔을 땐 엑스레이 찍더니 이 사이에 생긴 충치를 다 적발하던데. 그렇게 집 천장 공사할 때나 나야 하는 소리가 내 눈 밑에서 나는 경험을 그 때 했는데. 하지만 이런 검진에서 그런 걸 기대할 수는 없지. 다만 나는 그 할아버지의 왕촌스러운 발음과 그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태도와 자주색과 노란색이 섞인 삶은 옥수수 같은 나이든 외모와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라고 하면서 간단한 말을 반복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어떻게 이 그 긴 세월을 지나치며 그렇게 부드럽고 가벼울 수 있지. 나는 그런 태도를 원했나보다. 찌푸리지 않은 얼굴, 경직되지 않은 입꼬리, 운 단어. 그래서 그렇게 늙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의사가 아니지. 상관이 있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워너비는 또 오랜만이었다.






지하 일 층. 밥 먹으러 온 게 언젠지도 기억이 안 난다. 어제 나를 질질 짜게 만들었을 원인에 심심히 기여한 인턴이 그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직원식당 가는 인원을 종종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저 새끼 얼굴을 오늘도 봐야 한다니. 내가 이렇게나 누군가를 싫어했던 적이 있나? 그냥 같이 일하는 사람을? 간호사처럼 그렇게 붙어 있는 사람도 아닌데?


어디서 뭐 설사병 같은 거 안 나나? 좀 쉬는 게 어때. 쉬어. 나오지 마. 그래도 언젠가는 또 보게 되겠지. 계속 돌고 도니까.

그리고 어차피 내 눈물은 정말로 없던 거니까, 나만 잊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개쪽팔리지만, 에휴. 근데 피차일반이야. 개떡같이 내놓은 멍청한 오더나, 자기연민 쩔어서 짜던 눈물이나. 쌤쌤이다. 근데 쟤는 지가 부끄러운 것도 모를 거라고.




엑스레이 때 뺐던 목걸이를 다시 했다. 그새 줄이 다 엉켜 있었다. 대체 달리기를 어떻게 한 건지 목걸이를 한 채로 장식 바로 위에서 줄이 다 엉켰던 적이 있다. 혼자 사는 인생, 병동에 오지 않으면 그걸 풀어줄 사람이 없었다. 어제 내게 개판이었을 인계를 받은 동기가 생각났다. 일주일째 묶여 있던 그걸 풀어 줬다.


엉덩이 하나 걸칠 자리도 안 남아있던 스타벅스를 제끼고, 너무 길바닥 같아서 또 제낀 공차, 그리고 할리스. 스케-링. 스켈 -링. 칭찬을 듣고, 의도치 않은 열세 시간의 금식 끝에 나는 생전 시키지도 않던 모카 어쩌고 할라치노를 시켰다. 크림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올라가 있었다. 글쎄. 그 김봉기 할아버지도 이런 걸 아예 안 드시진 않았을 거야. 너무 달고 달아서 이것만 먹어도 배가 차는 기분이다. 좋은 건가.




앉아 있으려니 등장한, 이 병원 위에 위에 위에 어디쯤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 니 왜 여깄냐? 역시 우린 운명인가봥, 자기야. 인생, 망할 듯 망하지 않는 인생. 계속된 인연. 사건. 어제와 똑같을 병동. 4년 전 이곳에 최종합격한 7월. 일 년의 절반이 지났다. 콘서트 때 돈 심심찮게 썼다. 평생 호구처럼 콘서트 가고 앨범 사면서 돈 써 줄 테니까 하이라이트가 계속 활동했으면 좋겠다. 히포캠퍼스와 노엘 갤러거와 기타등등 많은 밴드들도.


내년에도 이 검진을 하고 있으려나?

알 수 없는 인생이다. 내일은 슈퍼맨 보러 갈 거다. 진짜로.




아. 올라가기 싫다. 내가 그렇게 눈물바람인 채로 내내 일했던 게 전체인계가 꽤 돌았을 텐데. 수쌤이 또 뭐라고 하려나. 아니면, 아예 화제조차 안 됐까.


뭐. 어쩌라고다. 관둘 것도 아니고.

직장이잖아. 직장. 돈 벌러 온 곳.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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