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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잉오렌지 Mar 31. 2024

사랑을 하지 못하는 아이

이런 나를 뭐라고 불러줄래?

두번째 사랑의 감정이 내게 찾아왔다.






정말 찾아온 게 맞나?





나는 집과 가까운 수도권 대학에 들어갔고, 들어가서 소위 말하는 '나답지 않은' 행동을 많이 하고 다녔다. 


가면도 쓰다 보면 진짜가 된다. 내가 행동하는 대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받아들인다. 의도적인 연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내 몸에서 말과 행동이 튀어나간다. 티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의외로 그렇게 통찰력이 깊지 않다. 원래 성격 같은 건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다고 나는 점점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정말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내가 대학에서 느꼈던 어려운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인간관계.




나는 낯가림이 없는 편이다. 의외로.


나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더 잘 거는 편이다. 학교에 처음 가는 오리엔테이션 당일날에도 나는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술잔을 부딪히며 시끄럽게 떠들고 다녔다. 동기 친구들과도 금방 친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예전에는 말없는 아이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말을 잘 거는 것과 별개로, 걸기 싫기는 하다. 나는 인간관계를 늘리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며, 외롭다는 느낌은 여태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걸어야 하니까 걸었다. 이상한 취급을 받는 게 더 싫었으니까.

 



그러나 '낯가림이 없다'의 정의를 '누구와도 깊은 친구가 될 수 있음'이라고 한다면, 나는 낯가림이 많은 편이다.


극심한 편이다. 나는 그 누구와도 깊게 친해질 수 없었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진심이랄 게 없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자신의 진심을 의도적으로 계속 죽여왔던 사람이라면?



나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긍정적으로 다가가는 법을 알았으며, 그 사람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파악하는 것을 즐겼다. 분위기에 맞게 행동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 배려하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결코 그 사람이 좋아서 배려하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어떤 배려냐고 묻는다면.. 


친구가 30분 넘게 약속 장소에 오지 않아서 전화를 걸었더니 잠에 겨운 목소리로 내 전화를 받아도, 처음엔 화가 났지만 나중엔 인내심이 늘어서 화가 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나는 약속시간에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행위가 익숙해졌고, 나중에 같이 놀이공원에 가는데 친구가 차를 놓쳐서 3시간 후에 도착했다고 해도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지금은 내 멘탈을 길러준 그 친구에게 많이 고마워하고 있다.


또다른 케이스로..


다른 친구들이 과제가 너무 빡세다며 교수님을 욕할 때도, 내겐 빡세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냥 맞장구쳐줬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이 과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그날 새벽에 미리 내가 자료를 정리해서 설명해주는 건 일상이 되었다. 친구들은 내게 고맙다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나는 회의 시간이 길어져서 다른 사람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싫어서 그랬던 것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한 모든 고생을 나의 성장이라고 합리화했고, 


사실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나는 나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배려를 했다.


꼭 물질적인 이득만 이득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랬을까, 인간관계를 일 같은 것으로 느끼게 된 건.


일, 비즈니스. 비즈니스 같아서 싫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즐겁고 성취감 있는, 나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그런 기분 좋은 비즈니스다. 


하지만 아무리 즐거운 일이라고 해도, 일이란 게 결국 무엇인가? 나의 에너지를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에너지를 회복하거나 스트레스를 푸는 게 아니다. 같이 시간을 보낼 때는 즐겁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급격하게 피곤해진다. 그래서 나는 주말이나 하교 후에는 핸드폰을 일절 보지 않는다. 내 진짜 사적인 시간이 방해받는 것이 싫어서.



그래서 나는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즐거운 비즈니스'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는 연애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 무엇보다도 사적인 시간이 되어야 할 연애에서도.


분위기를 읽고 맞춰주는 것에서부터 쾌감을 느끼는 나는, 인간관계를 할 때 내 취향이 담긴 사적인 의견은 거의 꺼내지 않게 되었다. 



예전과 똑같았다. 진도를 빼면 어떤 느낌일까? 어디를 가야 할까? 뭘 하면 재미있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두려웠다. 내가 느끼는 긴장과 불안은 설렘에서 비롯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없었다. 나는 이제 호기심과 애정을 구분하지조차 못했다. 


그냥 친구라면 이렇게까지 긴장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친구는 그렇게 깊게, 가깝게 내게 다가오지 않으니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즐거운 활동을 하면 그걸로 끝이다. 함께 카페에서 떠들고, 술 마시며 게임을 하고, 노래방을 가고.. 깊게 캐묻지 않아도 함께 보낼 수 있다. 진심을 털어놓을 수는 있지만, 진심을 털어놓는 것이 의무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연인은 다르다. 연인은 어떤 즐거운 활동이 아니라 오로지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나의 깊은 부분에 집중한다. 연인에겐 그 무엇보다도 내 진심을 드러내야 할 의무가 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내 의견을 강요했나? 말을 너무 세게 했나? 혹시 말실수를 하면 어떡하지? 들키지 않을까? 상대가 뭔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네. 다음엔 이렇게 말해야겠다. 이렇게 말하면 무슨 반응일까?


나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되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생각하겠지? 생각할 거야. 



하루하루를 이런 불안 속에서 보냈다. 예전처럼. 고등학교 친구에게 말없는 아이의 존재를 들키지 않을까 안절부절 괴리감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그때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 연애는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전혀. 그리고 나 자신 또한 연애는 다른 인간관계와는 특별하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괴로웠다.


하루하루 감정적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이 싫었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목숨 걸며 의미 부여하는 나 자신이 싫었다. 상대 때문에 내 일상이 흐트러지는 것이 싫었다. 점점 사랑에 증오가 섞여간다. 나 혼자라면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는 내 삶을 상대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상대가 내 삶에 들어오는 것이 싫었다. 색깔이 마구잡이로 뒤섞여간다. 나도 모르게 잿빛이 묻어나온다. 섞여서는 안 된다. 


나는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내 색깔이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이 싫었다.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는 이런 계산과 실험의 연속이었던 나의 '연애'에서 미안함과 무의미함을 느끼고 상대에게서 돌아섰다. 자연스럽게. 그 누구도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지긋한 주황빛 자유를 느낀다.

 



나는 나의 잿빛을 지우고 치유하는 것보다는, 적응하고 분리해서 전시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게 더 좋았으니까.


내가 이렇게,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리란 건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내 가면을 벗을 수 없다. 벗기 싫다.


나는 결국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



난 다시 마구잡이로 뒤섞인 잿빛의 인간이 되기는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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