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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Feb 23. 2024

초보엄마의 엄마랍니다

조금 늦어도 괜찮아

큰 손자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난 후, 칭얼거리는 둘째를 재우러 들어간 딸이 한참을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는 아이를 재우고 나서 운동을 하거나 책을 읽던 딸인데... 피곤한가, 재우다가 같이 잠이 들었나 생각하고 하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잠시 후, 딸이 어두운 표정으로 방에서 나왔다. 왜? 하고 물으니,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어..... 뛰기도 싫고... 샤워도 하기 싫어.....'

만회할 길 없는 수면부족과 누적된 피로 때문에 오는 만사 귀찮음, 우울감, 그러니까 달리 표현해서, 육아로 인해 번아웃이 온 모양이다.


나는, 내가 와서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청소도 하며 아이들도 가끔 봐주는데 아직도 그렇게 힘이 드나 싶은 마음도 있고, 내가 있으니 긴장이 풀어지면서 손도 까딱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잠깐 오는 건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애기가 아직 어리니까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애들이 나한테만 붙어있으니까 물건정리도 못하고, 이삿짐도 못 싸고, 저녁에는 애들 재우고 나면 나도 쉬고 싶고...'


그 느낌! 나도 알지. 아기한테 손발 다 묶인 듯한 그 느낌, 내 몸인 듯 내 몸 아닌 답답함.


'애기 재우면서 누워서 인스타 봤는데, 나보다 몇 년 후배였던 아이들이 벌써 자기 사무실도 내고..... 동기들 중에서는 이제 강의하는 애들도 있고..... 이렇게 애만 보고 있으니까 나만 자꾸 뒤처지는 것 같애. 그런 거 보고 나니까 더 우울해져.'라며 기운 없이 말을 이어갔다.



딸은 두 번의 출산으로 육아휴직을 두 번 했다. 물론 아이들은 예쁘지만, 2년의 시간 동안 일을 단절하고 집에서 육아만 해야 했으니 혼자서 얼마나 답답하고 한편으로 조바심이 났을까!


어미로서 아이에게 쏟아야 하는 시간은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조금 늦는다고 해도 어느 나이에 도달하면 모두가 마찬가지이니 너무 안달하지 마라, 옛날 너희들이 어렸을 때 우리 집이 망해서 얼마나 절망적이었는 줄 아니, 그런 거 생각하면 감사한 상황이 네 주변에 얼마나 많은 지, 까지 둘러둘러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진 딸은, 식구들과 떨어져 혼자 대학 다닐 때 힘들었던 이야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무거웠던 얼굴을 조금씩 폈다. 오랜만에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며 모녀간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손자도 잘 잤는지 방에서 나오며 방긋방긋 웃었고, 그즈음 우리 얘기도 끝이 났다.


인생은 단숨에 먼저 도착해야 하는 100미터 경주가 아니라 완주를 향한 길고 긴 마라톤이기에, 조금 늦는 것은 아무래도 괜찮은 것이지만, 한창 일할 나이에 육아만 하며 집안에 갇혀서 지내는 초보 엄마들은 아무래도 경력단절에 대해 위협을 느끼며 위축되기 마련이다. 그 시간을 다 지나온 나는 초보엄마의 엄마로서, 딸의 답답함을 들어주고 내가 아는 것을 말해주는 방법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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