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과 함박꽃나무
올해는 집 근처 나눔 텃밭 분양받기에 성공했다, 3년 만이다. 신선하고 쫄깃한 채소를 떠올리니 생각만으로도 건강해지는 것 같다. 밭에서 자란 제철 채소를 공급받는다는 것은 식탁의 고민을 하나 더는 일이다. 깨끗하게 씻어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
그래서 돌이켜보면 역시 지난겨울은 아무리 사철공급받을 수 있는 채소들이 있지만 가격면에서나 생생과 맛에서 어딘가 만족스럽지 않고 지루해지기십상이었다. 이건 가을 무가 철일 때의 단무지, 땅콩이 철일 때의 땅콩버터 같은 가공식품도 맛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 이후에 더 심해졌다. 그렇지만, 그럴 때 어김없이 동지, 설날과 정월대보름에 맞춰 김장김치와 말린 곡식, 나물들이 힘을 발휘하며 기분전환을 시켜준다. 김치가 떨어지는 봄이 되면 씁쓸하면서 향이 강한 야채들의 씩씩한 기운으로 한 번의 고비를 더 넘고, 비 온 뒤 씨앗을 심으면 삐쭉한 새싹들이 나기 시작할 것이다. 올해는 산머위잎을 맛보았다.
4월 느지막이, 많은 꽃들이 화려하게 펑펑 피어있는 봄에 창경궁 홍화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낮은 관목 정원에 아담한 하얀 꽃몽우리를 볼 수 있다. 친절하게 이름이 적혀있다, ‘함박꽃나무’ 식물도감에서 본 봄의 꽃. 뽀얗고 둥글둥글하게 너무 화려하지 않으면서 단정해 보이고 이름 또한 마음에 드는 보고 싶은 꽃이었다.
다른 꽃들처럼 곧 피겠구나 싶어 며칠을 더 가서 보았지만 변화가 없었다. 내일은 이래서 못 오고, 모래는 저래서 못 오니 오늘은 꼭 피어주면 좋겠는데 '안 되겠니?' 급한 성격의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닦달해 보았지만 꿈쩍이지 않는다. 이건 어쩔 수 없이 나의 성질만 드러내는 것으로 끝날 의미 없는 재촉이다. 기다려야 한다. 나로서는 꽤 까탈스럽게 생각되었다. 급하게 날이 더워지고 주말을 보내고 비가 오고 잊었다가 다시 가 보았을 때는 꽃이 지고 짙은 여름이 시작된 때였다.
다시 보게 된 것은 우연이였다. 다음 해, 이번에는 5월의 마지막 주 초여름, 서울역 앞 수많은 버스들이 오가는 환승센터 위 '서울로7017'에서. 쨍쨍한 햇빛에 눈이 부셔 반쯤 감고 지나다 눈에 띄는 하얀 꽃을 보고 가까이 다가가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 꽃이다. 목련 같이 도톰한 흰 꽃잎이 조금은 수수하게 펼쳐졌는데 그 안의 붉은 꽃 술은 기하학 패턴같이 또렷하게 느껴지며 화려한 조금 이상함이 있는 꽃이다. 5월의 꽃은 장미만이 아니었다. 올해는 어떤 모습의 함박꽃나무를 보게 될까.
동네 산수유꽃들이 활짝 피었다. 화단의 어린 매실나무도 붉은 꽃을 피웠다. 진달래와 개나리도 종종 보인다. r의 학교친구 00이네 집 앵두나무에 꽃이 피었는데 약간 이른 것일 까. 조금 있으면 목련이 피고 질 것이고, 하얀 벚꽃 비가 내리고 나도 한참 북한산 둘레길로 이어지는 분홍 왕벚꽃길을 산책할 수 있고, 지대가 높은 산중턱의 구름나무는 그제야 조그만 하얀 꽃잎들을 냇가에 흩뿌릴 것이다. 붉은 벽돌 담장에 늘어진 능선화길을 걷다 보면, 학교 운동장 옆 펜스에 기대 있는 장미 길을 달려 텃밭으로 갈 수 있다. 그곳에는 쌉싸름한 보랏빛을 띠는 상춧대에 꽃이 올라와 있을 것이고, 작고 진노랑 꽃을 피운 텃밭 작물들이 (조금 과장해서) 밀림처럼 우거져 있을 것이다. 바질 꽃 주변에는 벌과 나비가 오간다.
'이제 한여름이구나.' 하며 '꽃은 다 졌지.' 할 때, 동네 학교 공지에 심어진 배롱나무가 힘들게 꽃을 피운다. 관리받고 있지만 서울의 겨울은 춥고 한해 한해 힘겹다. 자주 가던 주문진 복숭아(장덕리) 마을 숙소 근처의 오랜 가옥들은 훤칠하게 잘 자란 배롱나무를 한 그루씩 가지고 있었고, 그 나무들은 여름의 바다와 나뭇잎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을 찐 분홍의 꽃들을 마당에 가득 뿌려놓았기 때문에, 여름휴가에서 돌아와 동네 배롱나무를 보면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을과 겨울의 꽃 이야기도 이어서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한풀 꺾인 저녁 햇살 속의 '노래하는 사람'처럼 숨을 고르는 편이 좋겠다, 사실 이제 막 봄이 막 시작되었으니.
그럼 우선 올해의 꽃들은 여기서 안녕히.
(브런치 글쓰기 알람이 여기까지 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