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거 하나만 알고 가. 이거 하나만 듣고 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도 날 잊으면 안 돼."
가수 이기찬의 노래 '미인'의 마지막 소절 노랫말이다. 10년도 훨씬 전에 유행했던 노래를 나는 이제야 찾아 들으며 이렇게 절절한 보컬의 좋은 노래가 있었나 새삼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저 마지막 노랫말이 초큼 마음에 걸린다. 헤어지는 연인에게 자신을 잊지 말라는 당부라니, 이거 참 이해가 안 가는 발상이지 아니 할 수가 없다. 헤어진 마당에 굳이 나를 기억할 건 또 뭐고, 거기다 나 싫다고 떠나는 사람이 하이고 퍽이나 기억해 주겠다. 이건 비싼 밥 먹고 허황된 바람을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남자는 눈물을 쏟아내고 여자는 기어코 떠나가고 아무리 노랫말이라지만 상황이 너무 극적인거 아닌가?
아무도 놀아주지 않는 신세인 나는 노래를 듣다 말고 이런저런 물음과 대꾸를 혼자서 주절 주절대며 놀고 있는 중이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그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 친구라면 저런 당부를 하고도 남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는 이십 대 시절 잠시 마주했던 어렴풋이 이미지로만 기억나는 한 사람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 대학시절의 일이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나는 지방에 사는 여고 동창 M을 찾아 놀러 갔다. M은 한 지방 소도시에서 교육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도청 소재지가 무색하게 아주 작고 시골티마저 풀풀 풍기는 곳이었다. 시내에 오랜만에 나와 봤다는 M을 만나 아무것도 볼 게 없는 시내 번화가에서 돈가스로 점심을 먹었다. 딱히 할 게 없던 우리는 곧장 시내를 벗어나 M의 주거지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가 M의 대학교는 인적 끊겨 적막하고 암담하고 그리고 작았다. 그냥 시내에 머물 걸 그랬다. 한산한 교정을 가로질러 흙길 위로 꼬불꼬불 난 골목을 지나 단층 주택을 마주했다. 서울에선 좀체 볼 수 없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M의 자취방이었다. 뉴페이스가 왔다는 소식이 인근 자취지구에 퍼진 건지 어쩐지 주말에 자취방에 머물던 M의 친구들이 재미거리를 찾아 하이에나처럼 몰려 왔다. 고등학생이라 해도 믿을 만큼 하나같이 수수한 모습들이었다. 그중에는 M의 남자 친구인 K도 있었다. 사실 친구의 이성친구를 만나는 자리는 어색하기 마련인데 K는 동갑내기라 그런지 첫 만남에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곰돌이 푸를 꼭 닮은 K는 푸근하고 친근한 인상을 가졌다. 게다가 말을 재미있게 하고 성격이 외향적인지라 분위기 메이커 역할까지 톡톡히 했다. 함께 어울리다가 때때로 보면 K는 어리바리한 내 친구 M을 살뜰히 보살피고 있었다. 친구 같고 오빠 같은 연인이었다. 그날 나는 밤새 그 친구들과 놀아제끼다가 다음 날 늦어서야 서울로 향했다.
이 날 어떻게 놀았는지에 관한 자세한 기억은 없다. 어렴풋이 풍금을 치며 함께 노래를 불렀던 기억도 나고, 또 색종이를 가져다 그들의 종이접기 과제를 도왔던 것도 같다. 수학교육과라는 친구 M의 수학 문제를 같이 풀기도 했다. 장래의 초딩 교사들답게 이들의 놀이나 여가활동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M은 교대를 졸업한 뒤 곧바로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M의 남자 친구 역시 졸업하자마자 교편을 잡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 입대했다. 신입생 때부터 줄곧 함께 지내오던 커플이 처음으로 떨어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M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 K랑 헤어졌대이. 언니 외롭다. 소개팅 좀 시켜 줘 봐."
"그뤠에? 그면(그럼) J한테 함 물어보께."
경상도 사람들답게 말이 참 짧다. 우리는 아니 나는 남의 사랑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이별 이야기 같은 건 더더욱 궁금해하지 않았다. 친구가 외롭다니 좋은 일 한답시고 나는 곧장 남자들로 바글바글한 공대를 졸업한 또 다른 여고 동창 J에게 전화를 걸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J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선배 하나를 물망에 올렸다. 소개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소개팅이 잘 된 모양이었다. 워낙에 성격이 모난 데 없는 M인지라 아마 누구와 어울렸어도 잘 지냈을 것 같긴 했다. 소개팅을 간접 주선했다는 이유(죄)로 나는 M의 연애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아도 간간이 들으며 지냈다.
여전히 대학생이던 나는 어느 주말 M이 근무한다는 경기도의 한 중소도시로 놀러를 갔다. 번잡스럽고 딱히 볼 거 없는 시내에서 밥을 먹고 굳이 영화를 한 편 보고 이번에도 M의 집으로 이동했다. M이 취미로 배운다는 풍선아트를 구경하고 실뜨기인지 구슬꿰기인지 그런 것도 하다가 저녁으로 시켜 준 치킨을 뜯어먹었다. 한 때그 많던 M의 친구들이 없으니 더더욱 무료한 저녁이었다. 그러고 보니 곰돌이 푸 K가 생각났다.
"내 얼마 전에 전 남자 친구 K 만났대이. 제대했다면서 연락이 왔더라고."
K는 제대를 하자마자 M에게 만나자고 연락한 모양이었다. 새로운 연애를 잘 이어가던 M은 이전 남자 친구를 만나야 될 이유도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다는 K의 간곡한 부탁이 이어지자 M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한 카페로 나갔다.
"똑같드라."
K는 스물 중반이 되었어도 스무 살 때와 같은 풋풋한 모습이었다. 곰돌이 푸처럼 친근하고 다정한 모습도 여전했다. K는 M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붙잡았다. M이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 걸 알았지만 그래도 붙잡았다.
"근데 나는 이미 마음이 떠났단 말이야." M은 당시의 심경을 한 마디로 표현하고 말았다.
M이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걸 마침내 처절히 깨달은 K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다 내려놓은 채 앉은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군대까지 다녀온 다 큰 성인 남자가 카페 한 구석에서 엉엉 울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눈물 많은 M이 그 모습을 보고서 덩달아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사람은 사랑해서 울고, 또 한 사람은 미안해서 울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야아... 그렇게까지 붙잡는데 왜 안 되겠드나?" 나는 K가 가여워졌다. 소개팅을 시켜준 게 바로 나였다는 사실도 망각하고 말았다.
"K는 좋치, 좋은 사람이지. 근데 인제 K한테는 연애감정이 안 든단 말이야." 의외로 맺고 끊음이 분명한 M이었다.
나는 크면서 남 앞에서 울어본 기억이 거의 없다. 눈이 크면 눈물이 많다는데 나 역시 눈이 크고 그래서 그런지 눈물도 많았다. 어릴 적엔 언니 오빠에게 사소한 놀림만 받아도 발을 동동 구르며 설피 울어댔는데, 차츰 철이 들면서부터 남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는 건 몹시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남들 앞에서 우는 것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다. 내가 혼자 영화 보는 걸 좋아하는 이유도 남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웃고 울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친구 M앞에서 펑펑 울었다는 K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더욱 나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얼마나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울 수 있는 걸까. 그 무렵 즈음 나 역시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결별 통고를 받고 몹시 심란하던 때라 자꾸 K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다만 경우가 다른 게 있다면 나의 상대방은 "마지막으로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는 나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린 것이랄까. 나야 울고불고할 계획도 없었지만 애초에 그런 기회마저 원천 차단당한 셈이었다. 냉정한 녀석.
그 큰 덩치에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었을 K의 모습이 눈에 생생했다. K의 이뤄지지 않을 간절한 바람이 안타까웠고 M의 도무지 바뀌지 않을 냉정한 마음이 원망스러웠다. 좀처럼 감정을 느낄 줄 모르던 내가 처음으로 타인의 이별에 공감하던 순간이었다.
더없이 좋은 시절에 두 연인이 이런저런 약속을 늘어놓아봤자 이별 앞에선 마치 모래로 성을 쌓은 것마냥 힘없이 우르르 무너지기 마련이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 탓을 해 봐도 마음이 바뀌었다는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갈음되고 변명된다. 연인들의 이별 앞에 신의란 건 없다. 어쩌면 그래서 시원할 수도 있고, 쉬이 마음을 다칠 수도 있다. 한 때 너는 내 것이니 나는 니 것이니 온갖 간섭에다 공수표를 남발해 봐야 이별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상대에게 건넬 수 있는 당부라는 건 고작 "나를 기억해 줘"정도인지도 모르겠다.
이기찬의 '미인'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나는 오래 전의 K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마주 앉아 있는 두 사람, 자신을 냉정히 떠나는 연인을 차마 놓지 못하는 K의 모습은 노래 속 주인공과 꼭 닮아 있었다. 비로소 노랫말이 이해되고 상황이 수긍되어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할 수 있었다.
미인을 들을 때마다, 스무 살의 첫사랑을 눈물로 영영 떠나보내던 K가 아른거릴 것 같다. 가을이라 그런가, 바람에 노랗게 흩날리는 은행잎을 보면서 나는 절절한 사랑노래에 빠져 들고 있었다.
미인(美人)
이기찬
헤어질 때 늘 하던 짧은 인사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서글픈 거니
눈물이 두 뺨 위로 흘러내릴 때
그때서야 이별인 줄 알았어
제발 가지 말라고 차갑게 떠나지 말라고
가슴 아프도록 외쳐보지만
너는 떠나간다고 나의 손을 놓는다고
나를 두고 돌아서 버린 너
다시 사랑한다 해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나는 너와 같은 사람 다신 만나지 못해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울며 다짐을 해봐도
떠나가는 네 얼굴 보고 싶을 내가 정말 싫어
모두 꿈일 거라고 깨면 다 돌아올 거라고
아픈 마음을 위로해보지만
점점 멀어져 가는 너의 모습을 보면서
울고 있는 내가 다 가여워
다시 사랑한다 해도 다른 누군가를 만나도
나는 너와 같은 사람 다신 만나지 못해
백 번 천 번을 말해도 울며 다짐을 해봐도
떠나가는 네 얼굴 보고 싶을 내가 싫어
정말 사랑했었다면 나를 사랑했었다면
가는 길에서라도 한 번쯤은 돌아봐줘
이것 하나만 알고 가 이 말 하나만 듣고 가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도 날 잊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