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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테호른 Jun 28. 2020

상허 이태준의 봄 타는 입맛을 사로잡은 ‘달래 김치’

─ 이태준, <달래>





“시는 정지용, 산문은 이태준”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 이태준


상허 이태준은 한국 근대문학의 손꼽히는 명문장가로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로 꼽힌다.그는  “시에는 정지용, 산문에는 이태준이”란 말이 나돌 정도로 지난 1930년대 우리 문단을 주름잡던 소설가였다. 하지만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수필 《무서록》은 탁월한 명문장가로서의 그의 진가가 고스란히 드러난 작품이다. 무서록(無書錄)이란 ‘순서 없이 쓴 글’이라는 뜻으로, 제목에서부터 수필 장르의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고 있다. ‘수필’이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기에, 그가 제목을 그렇게 지은 데는 읽는 사람 역시 자유롭게 읽으라는 배려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서록》은 자연과 문학, 삶에 관한 그의 놀라운 통찰력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때문에 《무서록》를 읽는 이들은 돌, 바다, 가을꽃, 자연과 문헌, 수목 등을 더듬으며 자연을 통찰하고 상상하는 그의 능력에 혀를 내두르곤 한다.


그는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 이상을 알아본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1934년 7월 24일, 《조선중앙일보》에 이상의 시 <오감도>가 게재되자, 신문을 본 독자들은 그야말로 경악했다. 형식과 서술의 난해함은 차치하더라도 “오감도(烏瞰圖)와 조감도(鳥瞰圖)의 한자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바보에게 지면을 함부로 내주느냐”라는 독자들의 비난과 항의가 신문사에 쏟아졌다. 심지어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며 당장 사과하라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이상의 시 <오감도>를 신문에 싣기로 결정했던 당사자인 학예부장 이태준은 의연했을 뿐더러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좀 더 기다려 보자구. 원래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들은 비난받기 마련 아닌가.”


 결국, 그의 뚝심 때문에 <오감도>는 다음 달 8일까지 15편이나 신문에 연재될 수 있었다.  



▲ ‘한국 단편문학의 완성자’ 상허 이태준(오른쪽)과 그의 대표작인 수필 《무서록》.



천재 이상을 단번에 알아봤던 이태준… 비운의 삶을 살게 한 슬픈 가정사  


이태준의 글은 슬프다. 이는 그의 가정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대한제국 말기 개혁파로 하급 관리였던 이문교의 서자로 태어났다. 개화당에 가입한 그의 아버지는 개화파의 개혁이 실패하자 가족을 이끌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그가 다섯 살 무렵 화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지자, 그는 누이 둘과 함께 고향 철원의 친척집에 맡겨지며 온갖 설움을 받으며 자란다.


성장 후에는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뇌물로 막대한 부를 쌓은 민영휘가 세운 휘문고보를 다녔지만, 동맹휴업을 선동한 혐의로 곧 퇴학당한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비 탓에 일본 유학 중 중도 귀국한 그는 한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노숙자 생활까지 해야 했다. 그야말로 비운의 연속이었다.


이태준을 삶의 절벽에서 구한 것은 문학이었다. 그는 서정적 문체와 치밀한 묘사, 가난한 민중에 대한 애정 등이 담긴 소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33~1943년까지 어느 신문에서건 그의 연재소설이 실리지 않은 해가 없을 정도로 그는 큰 인기를 누렸다. 이에 그는 서울 성북동에 한옥을 짓고 골동품 수집 취미까지 즐길 만큼 ‘인생의 황금기’를 누린다. 그때가 그에게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해방 후 이태준은 임화 등 카프 쪽 인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면서 문단 인사들을 놀라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대표적인 순수파 작가였던 그가 뒤늦게 이념 싸움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더 깜짝 놀랄 소식이 전해진다. 1946년 8월, 그가 갑작스럽게 월북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오랫동안 잊혀진 사람이 되었다.



▲ 가장 행복했던 성북동 한옥에서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수연산방’이라 이름 붙인 이집은 지금도 남아 있다. (김명렬 서울대 명예교수 제공 사진)



봄 타는 입에는 약보다 달래 김치가 낫다”


말했다시피, 그의 작품 속에 드러난 자연과 문학, 삶에 관한 그의 통찰은 놀랍기 그지없다. 1936년 4월, 《여성》에 발표한 <달래>라는 작품이 있다.  


단골 반찬가게에서 우연히 달래를 본 그는 반가운 마음에 오랜 만에 어린시절의 향수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쌉쌀한 그 향취에 취해 “달래 김치는 봄 타는 입에 약보다 낫다”라며 침을 꿀꺽 삼킨다.



… (중략) …

달래의 그 아릿한 향기 속에는 나의 아득한 소년기의 향수가 담겨 있다. 저 북녘 웅기만의 해안 지대는 눈만 녹으면 푸석푸석하는 모새(모래)땅이 숱한 달래로 깔려진다. 긴 겨울 동안 정지(부엌)에 갇혀 ‘수수알’만 삶으면서 옛날이야기나 들어야 했던 아가씨들은 눈 녹기를 기다려 바구니와 비녀처럼 생긴 나무꼬챙이를 들고 달래를 캐러 나서는 것이 첫 봄나들이였다.

멧새가 나는 밭이랑에서 새파란 달래 싹을 찾는 재미, 달래에만 정신이 팔려 열 이랑, 스무 이랑 넘는 줄도 모르고 달아만 나다 겨우내 보지 못했던 이웃 마을 아이들과 마주치는 재미, 머리를 땋아 늘인 것이 제법 치렁거리는 아가씨들은 할머니의 고담(古談, 옛날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상기되는 남의 집 총각 이야기에 꽃이 피기도 이런 때였으리라.

… (중략) …

달래는 맛도 좋다. 된장에 지녀도 향기롭고, 무채에 무치거나 김치를 담가도 별미다. 그때 서당에 들어서면 훈장님의 담배 연기보다도 여러 아이 입에서 나오는 달래 냄새가 훅 끼치곤 하던 것이 생각난다.

차진 지장밥(기장밥, 멥쌀에 기장 쌀을 섞어 지은 밥)에 누렇게 뜬 달래 김치는 봄 타는 입에 약보다 나은 것이건만─  

─ 이태준, <달래> 중에서  






※ 위 글에 나오는 이태준의 <달래>는 다음 도서를 참조했습니다.

     ─ <녀름입니다, 녀름/ 루이앤휴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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