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모레 마감인 생물경시대회 참가하는 학생들의 탐구보고서가 교내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습니다. 3학년 손** 학생의 보고서 제목은 <장내 세균과 불면증에 관한 연구>입니다. 서일고 공지에서 음해성 게시물로 규정한 공감닥터와 골든티켓의 텔레그램 대화를 보면 생물경시대회 출전을 권유하고 <장내 세균과 불면증에 관한 연구> 자료를 공감닥터가 후배 의사에게 받아두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도 우연일까요? 논리적으로 추론해볼 때 두 사람의 대화는 허구가 아닙니다. 수상 시 생기부에 기록되는 교내대회에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은 명백한 불법입니다. 사각의 링처럼 치열한 고등학교 내신 전쟁터에서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의 땀과 열정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교육청 감사를 요청합니다.
닉네임 ‘학교를 부탁해’의 놀라운 지원사격! 도서관에는 나 혼자뿐이고 본관 교무실은 아직도 회의 중인지 불빛이 환하다. ‘학교를 부탁해’의 게시글 조회 수가 폭발하자, 10분 만에 해당 게시글은 삭제되었고, 생물경시대회 보고서 제출 현황도 빠르게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학교를 부탁해’는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자신의 글이 학교 홈페이지 운영자에 의해 삭제된 정황, 미리 정리해둔 생물경시대회 제출 현황, 그리고 주요언론사 홈페이지 제보 코너 링크를 처음 게시글에 추가로 덧붙여 재게시했다. 자신의 주장에 공감한다면 연대의 의미로 게시글을 복붙해 학교 홈페이지에 올리고, 주요언론사에도 게시글을 퍼 날라 제보하라는 구체적인 행동지침까지 제시한 것이다. 내가 학교 홈페이지에 처음 올린 글이 작은 파문이었다면, ’학교를 부탁해‘의 글은 살아있는 파도였다. 운영자가 일일이 다 삭제할 수 없는 게시글이 물결을 이루며 학교 홈페이지를 뒤덮었고, 자연스레 언론사 제보로 이어져 다음 날부터 <서일고 내신 부정출제 청탁> 관련 기사들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손동호 원장의 신간은 출판사의 결정으로 출간이 무기한 보류되었다. 며칠 후, 인터넷을 통해 불거진 이 사건이 해당 교육청 감사로 이어질지 주목된다는 뉴스가 나가자, 손동호는 자신의 블로그에 해명인지, 변명인지, 사과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글을 게시했다. 골든티켓은 오랜 기간 신뢰해온 사교육 선생님이며 수학문제집 선정과 교내활동에 조언을 받은 것일 뿐 사적인 대화가 유출되어 매우 유감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물경시대회 탐구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후배 의사의 논문을 일부 인용한 것은 사실이기에 양심적으로 책임을 지겠다고도 했다. 또 그동안 자신이 블로그에 올린 환자들의 이야기는 다양한 상담 사례를 섞어 재가공한 허구일 뿐이니 특정인을 지목해 오해하는 일이 없길 부탁드린다는 내용이었다. 골든티켓과 손동호가 중간고사 시기에 대치동 수학 1타 강사의 N 제를 주고받은 결정적 정황이 드러난 메시지가 삭제되고 없는 것이 아쉬웠다.
공감 정신과 홈페이지에는 손동호 원장의 미국 학회참여로 인한 휴진 공지가 올라왔다.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날부터 학교에 나타나지 않던 손지우는 이미 학교를 자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신과 의사로서 신뢰가 추락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손지우를 보호하기 위해 손동호는 ’법정 공방’과 ’퇴학 처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해간 것이다. 손지우가 깔끔하게 자퇴하면서 학교도 부담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완벽한 상황종료를 위해 학교는엉뚱한 곳으로 화살을 돌렸다. 손지우가 자퇴하고 일주일 후, 북태그 동아리 단톡방에 말도 안되는 글이 올라온 것이다.
-김효정 사서쌤 학교 그만두신대. 지금 짐 싸는 중.
-아니 왜?
-<학교를 부탁해>가 김효정 쌤이었대. 진짜 개짜증남. 쌤이 쓴 글 다 맞말인데 왜 쌤이 떠나야함?
-홈피에 근거 없는 추측 글을 올려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킨 괘씸죄라는데??
점심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지만, 정신없이 구관 6층 도서관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코로나 시기에도 비대면 활동을 풍성하게 개최하고 항상 동아리 학생들을 응원하던 김효정 선생님. 쌤이 왜 이 사건의 책임을 져야 하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분풀이다. 헉헉대며 도서관에 도착하자 동아리 친구 몇 명이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선생님!!” “점심시간 다 끝나가는데 뭐하러 왔어. 너희들은 그만 가봐. 쌤이 여름 방학에 연락할테니 다 같이 밥 한번 먹자.”
속상하고, 당황스럽고, 동시에 대상을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복합적인 감정으로 한껏 일그러진 내 모습을 보고 선생님은 동아리 친구들을 돌려보냈다.
“선생님, 죄송해요. 사실...학교 홈피에...”
“그만, 은호야. 말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기간제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아 여행 가려던 참이야. 우유니 사막에 가보고 싶었거든. 누구를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거야. 니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는데 입 다물고 있는 건 부끄럽고 쪽팔리는 일이야. 다행히 미혼이라 나한테 지킬 건 너희들밖에 없어. 김효정쌤 쪼금 멋있었다 이렇게 기억해 주면 돼.”
“.......”
“멋진 화이트 해커가 돼. 항상 응원할게. 그런 의미에서 이거 너 다 가져! ㅎㅎ”
책상 서랍을 열더니 쌤은 천하장사 소시지 한 박스를 꺼내 내 품에 안겼다. 교문 앞까지 선생님을 배웅했다. 맑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선생님. 작고 따뜻한 선생님의 손을 잡을 때 목구멍까지 뜨끈한 슬픔이 차올랐다. 왜 항상 지나고 나서야 미련함을 깨닫고 후회하는 걸까. 그나마 엄마가 떠난 뒤 깨달은 것, 마음을 전하는 고백은 타이밍을 놓치면 영영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선생님...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영영 이별도 아닌데 왜 이래~ 방학 때 보자!”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리는 선생님의 눈가도 촉촉하다. 엄마를 잃고, 살아있는 한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깨달은 순간, 화이트 해커를 꿈꾸기 시작했다. 사이버세상은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어떤 공격 앞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으면 다시 재건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통제 안에 있다는 착각. 하지만 그건 사이버 세상에서나 통하는 부캐였을 뿐, 나는 나조차 지켜내지 못했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 알게 되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골든티켓과 공감닥터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학교 홈페이지에 처음 게시한 것도 바로 자신이라 밝히며 ’학교를 부탁해‘가 모든 책임을 떠안고 떠났다는 사실을. 선생님은 처음부터 내가 벌인 일이란 걸 알고 있었을까? 다 알 수 없지만 나를 지키려 한 것은 분명하다. 안정된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책과 다음 세대가 좋아 사서가 되었다는 선생님. 내 마음속 소중했던 또 하나의 세상이 허물어져 내리고 있었다.
최상의 결론은 아니지만, 손동호의 책 출간을 막고 손지우도 일정 부분 타격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하나? 모든 시선에서 벗어나 숨을 공간이 필요하다던 선정이는 이제 편히 쉴 수 있을까? 엉뚱한 사람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며칠 후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시간, 편의점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발밑으로 빨대가 꽂힌 바나나 우유 빈 통이 나뒹굴었다. 우지끈~ 바나나 우유 통을 납작하게 밟으며 나를 응시하는 도도한 눈빛. 손지우였다.
“폭탄 터트린 거, 너지? 차은호.”
크로스 백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한 모금 마시고는 손지우는 나를 골목으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깊은 날숨과 함께 검은 밤하늘에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말했다.
“참 재밌어. ㅎㅎ 바나나 우유 때문에 덜미가 잡혔네. 바나나 우유 같은 초딩 입맛은 일찌감치 내다 버렸어야 하는데 말야. 나에겐 추억의 맛이지, 아주 잠시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아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개룡남이라 콤플렉스 덩어리, 감춰진 열등감이 장난 아닌 사람이야. 어릴 적부터 모든 면에서 뛰어나 보이는 내가 누구나 찬사를 아끼지 않는, 완전무결한 자부심이 되길 바랬어. 그런데 지명중학교에서 선정이를 만나면서 모든 게 꼬여버렸지.”
먼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지우의 눈빛이 텅 비어 보였다.
“그 인간 블로그에서 선정이가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집중력 높이는 약‘을 먹는다는 글을 봤어. 내 인생에 유일한 걸림돌, 지긋지긋한 그 아이. 정신 차리고 보니 악성 댓글을 달고 있더라구. 그 인간은 내가 망가져서 인터넷 공간을 헤매고 다닌 걸 몰랐어. 그 아비에 그 딸, 혐오스런 스토리텔러들이지. 다음 주에 헝가리로 떠나. 의대 가서 면허받고 유럽에 정착할 거야.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왔어. 오징어 게임 같은 학교, 나두 탈출이 목표였거든. 그리고 왜인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선정이 죽음에 꽤나 관심이 많은 거 같아 한가지 알려주려구. 그 애가 죽은 후에 죄책감? 그런 뭣 같은 감정 때문에 힘들었다고 하니까 그 인간이 알려주더라. 선정인 인터넷 악플 따위 때문에 죽은 게 아니라구.”
“그게 무슨 말이야?”
“궁금해? 너, 해커라면서? 그 아이 스마트폰에 괴상한 사진들, 이상하단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 더운 여름 읽어 주고 응원주시는 독자님께 감사합니다. 건강한 여름 보내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