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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도 숭고하신 분
아침을 날카롭게 가르는 알람이 여지없이 울린다. 잠은 그래도 잘 잤는지 개운하다. 일어나서 옆에서 업어가도 모를 아내를 보면 씩 웃음이 나온다. 귀여워서일까 재밌어서일까. 그렇게 아침부터 피식거리면서 방에서 나와 나의 루틴에 시동을 건다. 별건 없다. 영양제를 먹고 아침을 챙겨 먹는다. 퍼석퍼석한 닭가슴살이 이젠 그냥 그렇다.
(글쓴이는 전문선수는 아니지만 그냥 보디빌딩을 너무 좋아해서 시기를 나누며 다이어트를 하는 기간을 따로 갖는다. 여기서 시즌이란 의미는 다이어트 기간을 의미한다.)
시즌 기간이라 제 아무리 허여멀건 닭가슴살이라도 양껏 만큼은 먹고 싶은 마음뿐이다. 식사를 뚝딱 끝내고 잠이 몰려올 땐 잠깐 눈을 붙이거나, 그날따라 졸음기가 없을 땐 유튜브에서 불경을 찾아 들으면서 묵상한다. 요즘 새로 생긴 루틴이다. 그러다 8시 50분이 되면. 바로 딸내미를 깨우러 간다.
똑똑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축복이가 반쯤 웃으며 날 반긴다. 힘겹게 일어서서 갓 태어난 망아지 마냥 잠결에 비틀비틀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려서부터 벌써 출근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그렇다. 그렇지만 별수 있나. 이 아이도 살아가기 위해 사회생활은 필요한 법, 하지만 어린 나이에 계속 같이 못 있어 준다는 죄스러움은 여미고 꼭 숨긴 채 애써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딸에게 묻는다.
"오늘도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이랑 선생님들이랑 재밌게 놀다 와~ 갔다 와서 엄마아빠랑 카페도 가고 재밌게 또 놀자! 알았지?"
그랬더니
"응!"
고개를 들썩이며 분명 이렇게 말했다.
이제 16개월 차지만 말은 진짜 다 알아듣는다. 순간순간 이럴 때마다 너무 신기하고 뿌듯하다.
기어 다닐 땐 걸어 다녔으면 언제 걷는 걸 보나하고 있고, 걷고 뛰는 거 보니 언제 말하는 거 보나... 이러고 있다. 욕심이 많은 아빠라 이렇게 써놓고 보니 민망하다. 애써 씩씩한 척을 하는 건지 정말 태생적으로 씩씩한 건지 웃으면서 대답하는 딸을 보고 "아 애기도 저렇게 티 안 내려고 노력을 하는데 나는 어른이 돼서.. 가장이라는 이유로, 나는 모든 걸 짊어지고 있다는 알량한 자만심으로 힘들면 이제껏 다 내색해 왔구나 아이도 아내도 다들 각자 위치에서 부단히 들 노력하고 있는데.. 더 어른답게 굴자'라고 마음속에 한 번 더 깨달음을 새겼다.
내가 이제껏 생각한 아버지의 이미지는 과묵하고 무뚝뚝하지만 가끔의 따뜻한 말로 감동을 시켜주시는 그러한 아버지셨다. 아버지도 아버지가 처음이라 모든 게 완벽하진 않은... 어딘가 어수룩한...
실제로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는 영업직이셨고 나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영업직이란 게 뭔가 슈퍼맨 같았다. 뭔가 되지 않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 당시 기억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무언가를 해냈다는 그 표정과 행동이 멋있었고 그 뒷모습은 정말 크고 넓었다. 자식은 부모의 양분을 먹고 큰 다했는가, 내가 커갈수록 아버지의 약점과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땐 내가 그 정도도 감싸줄 수 없었던 그릇이었다. 주말까지도, 남들 흔히 가는 여름휴가까지 매년 반납하시고 우리 가족을 위해 일하셨던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냉전 상태로 고등학생 시절을 보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그냥 피했다. 아버지는 그런 날 포기하지 않으시고
문자로 매일같이 응원의 글을 보내주셨다.
그 고맙고 귀하디 귀한 관심을 나는 그냥 무시로 일관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난 중학생 때부터 그냥 망나니였다.
(이 세상 아들 가진 부모님께 경의를 표한다).
북한 조차 무서워서 못 내려오게 한다는 그 악명 높은 중2병은 고3까지 지속됐고 스무 살이 돼서도 아버지는 내 앞날을 매우 걱정하시고 손수 대입 전략까지 짜주셨고 턱없이 낮았던 점수에 맞춰 이 대학 저 대학 상담까지 해주시며 그렇게 나는 몇 군데 희망하는 대학을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렇게 지원하게 되었다. 다행히 내 인생에 즐거운 대학생활이 있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아버지 덕분이라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도 부자간의 서막함은 지속되었지만 큰 사건이 터지고 만다.
유학생활중 마찰이 좀 있었는데 거기서 아버지는 날 끝까지 믿어주셨다. 거기서 마음이 열린 것이다 그 이후로 아버지라는 칭호를 쓰며 존경심을 갖게 되었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칭호가 낯 간지럽기도 했고 무언가 거리감을 느끼실 수 있단 생각이 드셨는지 그냥 아빠라고 부르라고 하셨으며, 나는 더욱더 살가운 아들이 되기 위해 가끔 아빠라고도 하며 부자간의 흔한 에피소드가 될법한 것들이지만 그동안 할 생각조차 못했던 사우나, 여행, 등산 등등 같이 하며 그동안 못 쌓았던 추억과 공감대를 쌓아나갔다. 그렇게 행복함도 잠시 지병까진 아니었지만 평소 간이 좀 안 좋으셨던 게 내가 취업을 했을 땐 암세포로까지 변질이 되었다. 뭔가 내 지분이 많은 거 같고 모진 말도 많이 했던 터라 그땐 평일에도 회사 끝나고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매일 엉엉 울면서 갔더랬다.
그래도 도착해서는 눈물 닦고 퉁퉁 부은 눈을 진정시키고 가며 아버지의 걱정을 덜어드리고 싶었는데 오히려 나와 엄마의 걱정을 덜어주려 했던 당신. 감사하게도 수술은 잘 끝났고 완쾌하셔서 지금은 손주의 이쁨 속에 아주 행복해하시는 중이다. 즐거워하시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축복이가 정말 축복 중에 축복이며 새삼 복덩이로 느껴진다.
물론 부모라고 내 마음에 다 들 순 없다. 그건 반대로 모든 자식이라도 허용될 순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분명 답답한 일이 생기더라도 이 분 들은 세상 어떠한 누구보다 아니 본인들 챙기는 거 보다도 나를 우선적으로 챙겨준다는 건 변치 않는 사실임을 인지하고 좀 더 여유롭게 바라봐주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아직까지도 나에게 대입시키긴 어렵지만 언젠가 여기 브런치 계정과 이 글을 보여드릴 날이 올 때 좀 당당하게 보여드리고 싶다.
아버지라는 제목에 두 다른 가수의 노래가
문득 떠오르는 새벽이다.
#인순이-아버지의 노래를 부르기 전,
'부디 사랑한다는 말을 과거형으로 하지말라'
는 멘트와
#싸이-아버지의 후반부 마지막에 나오는
'당신을 따라갈래요'라는 가사가 나를 토닥인다.
어렸을 적 당신을 닮고 싶지 않고 반대로 살고 싶었던 제가 어느덧 당신의 인자한 표정으로 제 아이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투박한 아들이지만 그래도 딸 같은 아들이 되어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본받아 제가 가장 존경하는 당신의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부분사진 출처 : pixab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