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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니 Nov 13. 2019

납작 엉덩이를 위한 수영복

수영 배우러 갔다가 알게 된 것들_02


수영 수업 첫날. 스포츠센터 접수대에서 사물함 열쇠를 받은 후 수영장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맸다. ‘수영장’이란 푯말도 없고, 분주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묻기도 민망했다. 혹시나 하고 탈의실로 들어가 보니 수영장과 연결돼 있었다. 목욕탕이나 워터파크도 모두 탈의실을 통해 물로 가는 게 당연한 구조.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도 못할 만큼 많이 긴장해있었다.


사람이 많아 줄을 서서 씻어야 하는 샤워장, 물 밖에 서서 준비 운동을 하고 있는 수십 명의 수강생, 조금 무서워 보이던 선생님까지. 어느 하나 낯설지 않은 게 없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낯선 건 나였다.


뱃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광대뼈와 사각턱을 도드라지게 하는 수영 모자를 쓴 나. 기미 주근깨 다크서클 3종 세트까지 완비하고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나였다. 아침마다 품이 넉넉한 남방을 걸치고 커버력 좋은 쿠션을 바른 후에야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였는데, 수영장은 인정사정없는 곳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내 마음을 안심시키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밑단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3부 수영복. 보통 여성 실내 수영복은 삼각팬티 모양으로 엉덩이까지만 덮지만, 이 수영복은 사각팬티 모양으로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온다.

나는 이런 디자인의 수영복을 골랐다.


이 수영복을 고른 건 엉덩이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엉덩이는 옆에서 보면 반달 같은 곡선 모양이지만, 내 엉덩이 곡선은 그믐달 정도밖에 안된다. 아주 작고 빈약하다. 삼각팬티 모양의 수영복이 가장 보편적이고 예쁜 디자인도 많았지만, 팬티 부분이 내 엉덩이에 잘 고정돼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내 납작 엉덩이에는 수영복을 지탱할 만큼의 근육과 지방이 없고, 갈 곳 없는 수영복 엉덩이 원단이 결국 엉덩이 사이로 모여들지 않을까 걱정됐다. 수영 수업 내내 엉덩이에 먹힌 수영복을 빼는 일을 반복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이 수영복을 골랐고, 뱃살과 주근깨는 내어줬지만 엉덩이만은 지킨 것 같아 내심 안도했다. 그 후론 수영복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한 유튜브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수영 동작을 가르쳐주는 영상을 보다가 “제발 이런 수영복 입지 마”라는 영상을 재미 삼아 눌러봤다. 수영 강사인 유튜버는 안 예쁜 수영복 유형을 알려줬다. 끈이 두껍고, 허벅지까지 내려와 다리가 짧아 보이는 수영복.


음… 내 수영복이다. “주관적인 견해”라면서도 기왕이면 예쁘고 멋있게 입고 운동하면 더 좋지 않겠느냐는 그의 말에 진심이 느껴져 나는 더 슬펐다.


다음날, 자꾸 수영복이 눈에 거슬렸다. 인터넷 쇼핑몰 소개 글에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기능성 디자인’이라고 돼 있었지만, 이미 내 마음의 저항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예쁘다고 생각하는 수영복을 입을 필요는 없다. 내 수영복을 유심히 보는 사람도, 내 몸매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다는 걸 안다. 여성 몸에 대한 고정관념에 순응하고 싶지 않으며, 내 납작 엉덩이를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 역시 잘 안다. 내 머리는.


하지만 내 안에 사는 중학생은 좀 다르다. 여전히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 줄 안다. 머리로 아무리 ‘괜찮아’ 자기 세뇌를 해도, 누가 내 수영복을 쳐다보는 느낌만 들어도  긴장했다.


그러다 2019년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김서영 선수의 여자 개인 혼영 200m 결승 경기를 봤다. 아니 그런데, 김 선수가 경기할 때 입은 수영복이 내 것과 똑같은 디자인 아닌가.


결승 진출 선수 8명 모두 같은 디자인이었다. 역시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디자인이긴 한가 보다. 물론 동작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물의 저항을 논할 깜냥은 아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수영선수들이 입는 수영복과 똑같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맘이 왜 이렇게 편안해지는 건지.


팔랑귀에다 말도 안 되는 정신승리까지, 수영을 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내 수영복이 좋았다가 부끄러웠다가 다시 괜찮아지는 변덕을 겪은 후 나는 이제 수영복에 크게 신경 쓰지 않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수영복을 입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도 덜 불편해졌다. 늘 가리고 다니던 뱃살과 작은 엉덩이를 수영장에선 자꾸 드러내다 보니 내 몸 모양에 익숙해졌다고 할까. 내 몸을 조금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이렇게 내 몸과 수영복에 조금은 초연해진 어느 날, 준비운동을 하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높은 굽에서 내려와 똑같이 헐벗은 채 민낯으로 하는 것, 머리카락도 한 올 없이 그저 물에 사는 동물과 가장 가까운 모습이 돼 물속을 누비는 것, 이것은 수영의 매력은 아닐지. 어떤 몸매를 가졌고, 어떤 수영복을 입었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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