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꿈(23)_지렁이는 대지의 창자

단편소설 <꿈꾸는 꿈틀이>_23

by 시골뜨기

창문 바닥의 오목한 부분을 뚫고 내려가자 팽나무 할아범의 말대로 다섯 개의 구멍이 드러났다. 꿈틀이는 설렘 반 궁금 반으로 첫 번째 구멍에 들어갔다. 그러자 꿈틀이의 몸 마디마디가 모두 0 또는 1의 수로 변했다. 100마디가 훨씬 넘는 꿈틀이의 몸마디는 0과 1의 숫자가 되어 염주처럼 나란히 이어졌다.


0010100001100101010001000101110111110010011010000001001100110000000101000011001010100010000001001111101110010101100


삶은 동전처럼 두 면이 같이 있다. 생(生)과 사(死), 유(有)와 무(無,) 명(明밝)과 암(暗), 희(喜)와 애(哀) 등등. 그것은 나뭇잎 앞뒤처럼 따로 뗄 수 없다. 0과 1은 열쇠의 골과 산처럼 오목과 볼록이다.

꿈틀이는 아리송했다. 그리하여 두 번째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섯 마디가 한 묶음이 되었다.


00101.00001.10010.10100.01000.10111.01111.10010.01101.00000.01001.10011.00000.00101.00001.10010.10100.01000.00010.01111.10111.00101.01100

세상은 사방 동서남북에 네 자리가 있고 그 가운데에 한 자리가 있는데, 이 다섯 자리가 모여 한 모둠이 되었다. 꿈틀이는 다섯 개의 수로 이루어진 한 묶음의 수 모둠이 어떤 뜻이 있으리라고 짐작은 했지만 아직 어떤 뜻인지는 도통 몰랐다. 그래서 세 번째 구멍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구멍으로 들어가니 0과 1로만 이루어진 이진법의 다섯 개 수 모둠은 십진법의 아라비아 숫자로 변했다.


5. 1. 18. 20. 8. 23. 15. 18. 13. 0. 9. 19. 0. 5. 1. 18. 20. 8. 2. 15. 23. 5. 12


꿈틀이는 네 번째 구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알파벳 문자들이 제멋대로 뒹굴고 있었는데, 각 문자들은 알파벳 순서대로 번호가 매겨진 꼬리표가 달렸다. 아라비아 숫자로 이뤄진 꿈틀이가 들어가자 널브러져 있던 알파벳들은 자기 번호에 맞게 꿈틀이의 몸에 달라붙었다.


5E. 1A. 18R. 20T. 8H. 23W. 15O. 18R. 13M. 0. 9I. 19S. 0. 5E. 1A. 18R. 20T. 8H. 2B. 15O. 23W. 5E. 1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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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구멍은 맞춤 관처럼 꿈틀이의 몸틀에 넉넉히 알맞았다. 꿈틀이는 그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도가니 안의 밀랍이 녹듯 꿈틀이의 몸은 서서히 녹아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앞의 아라비아 숫자도 같이 녹고 뒤의 알파벳 문자만 남았다.


EARTHWORM IS EARTHBOWEL


꿈틀이는 점점 제 모습을 잃어가고 의식도 스러졌다. 가물가물 꿈에서 꿈틀이는 한 줌의 흙이 되었다. 그 흙에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동물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꿈결에 아득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흙에서 생겨나서 흙으로 돌아가리라.”

“흙은 생명의 뿌리이며 만물의 자궁이다.”

“땅을 독점하거나 파괴하는 자는 결코 그 대가를 피하지 못하리라.”


그 소리는 꿈틀이가 알속에 있을 때 들었던 소리였다. 그때는 누구의 소리인 줄 몰랐는데, 지금 들어보니 흙의 요정인 흙지킴이의 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계속해서 소리가 들렸다.


“꿈틀아. 네가 꿈꾸도록 네게 경험시켰다. 꿈은 경험의 몸이 상상의 날개를 다는 것이다. 꿈을 꿔라! 꿈틀거려라!”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꿈틀이는 흙이 되었다.


Earthworm is Earthbowel (지렁이는 대지의 창자다.)
-아리스토텔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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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창자, 지렁이 (그림 최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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