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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귀족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이 되다

#12 이르쿠츠크 1편 : 노어노문학과 자퇴하러 가보는 러시아

by Boybeen Mar 10.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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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정교회 성당들은 알록달록 화려해서 좋다. ⓒboybeen러시아 정교회 성당들은 알록달록 화려해서 좋다. ⓒboybeen


바이칼을 떠나는 날 아침. 흐린 날씨만큼이나 컨디션도 좋지 않았다. 사실 카약을 끝내고 한 번은 해봐야겠다며 잠시 호수에서 첨벙거렸는데, 수영도 못하는 데다가 삐쩍 마른 몸으로 웃통까지 벗었은 탓에 밤새 고열에, 두통에 꽤나 시달렸기 때문이다. 혹시 쓸 일이 있을까 하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둔 테라플루(러시아어로는 쩨라쁠류다)를 홀짝이며 그래도 맛은 있다고 생각하는 게 철저한 건지, 긍정적인 건지, 철이 없는 건지 싶었지만. 끙끙 앓다가 잠을 깨어 폰을 보니 다행히 이르쿠츠크로 향하는 버스 시간은 넉넉히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가방에 짐을 욱여넣으며 체크아웃을 준비했는데, 아픈 건 아픈 거고 마지막 날에만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알혼섬에서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 '이르쿠츠크'라고 적힌 표지판을 꼭 찍고 싶어서 기다렸다. ⓒboybee알혼섬에서 이르쿠츠크로 돌아가는 길. '이르쿠츠크'라고 적힌 표지판을 꼭 찍고 싶어서 기다렸다. ⓒboybee


난 떠나온 곳에 대한 미련이 많은 편이다. 좋게는 그리움이고 나쁘게는 후회겠지만, 졸업이든 전역이든 꽤 오래 여운이 남았던 것은 사실이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그러한 감정을 잘 흘려내는 법을 익혀가고 있고, 지금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되 마지막을 나눌 시간을 충분히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은 무려 11개 도시를 횡단하는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중점에 두었던 부분이기도 하다. 항상 마지막 날은 일정과 교통편에 여유를 뒀다. 덕분에 마지막으로 바이칼과 유정 모두에게 충분히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수 있었다. ‘Bye’로 헤어진 이 모든 무언가들과 다시 ‘Hello'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스물셋의 바이칼을 그렇게 뒤로 했다.


평일에도 정말 사람이 많던 중앙시장. 전역을 여행해도 이런 일상적인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boybeen평일에도 정말 사람이 많던 중앙시장. 전역을 여행해도 이런 일상적인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는다. ⓒboybeen
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잡지를 많이 본다. 특히 인터넷이 안 되는 열차 내에서는 필수인 듯했다. ⓒboybeen러시아는 아직까지도 잡지를 많이 본다. 특히 인터넷이 안 되는 열차 내에서는 필수인 듯했다. ⓒboybeen


편도 6시간이라는 대장정답게 꼬박 해가 질 때가 되어서야 이르쿠츠크에 도착했고, 오전 버스로 미리 도착한 비비안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사실 다음날 점심도 같이 먹었는데, 중국인과 한국인이 러시아에서 만나서 먹은 두 끼가 초밥과 쌀국수라서 서로 ‘Something weird'하다며 웃었다. 아쉽게도 비비안과는 식사 이후로 같이 다니지 못했는데, 컨디션이 쭉 좋지 않아서 혹시 내가 비비안의 여행을 망칠까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앙시장을 적당히 둘러보고서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기대했던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으로 향했다. 데카브리스트는 러시아 최초로 근대적인 혁명을 시도했던 19세기의 귀족장교 청년들인데, 실제로 꽤 본격적인 반란도 일으켰지만 빠르게 제압되어 이르쿠츠크를 비롯한 시베리아 곳곳으로 유배를 당했다. 그렇게 와해되는 것으로 결론이 맺어질 것 같지만, 이들이 정착한 후 당시 유럽의 트렌디한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한다. 덕분에 이르쿠츠크는 ‘시베리아의 파리’로 불릴 정도로 문화적으로 번성할 수 있었는데, 나 역시도 같은 시베리아에 해당하는 직전의 울란우데나 직후의 노보시비르스크보다 훨씬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데카브리스트 박물관 앞 정원.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다. ⓒboybeen데카브리스트 박물관 앞 정원. 이 장면이 너무 좋아서 한참을 서 있었다. ⓒboybeen


그중에서도 박물관으로 운영 중인 트루베츠코이와 발콘스키의 저택을 방문했는데, 저 멀리서도 잘 찾아왔음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산뜻한 연보라색과 연남색의 포인트 컬러가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었지만, 내부의 가구나 소품에서 유배 중에도 한 가문이 어느 정도 여유롭게 지낼 재력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발콘스키의 저택에선 정원과 별채에서 실내공간으로 이어지는 공간적인 흐름에서 세련됨을 느낄 수 있었고, 트루베츠코이의 저택에선 입구에서 출구까지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단계별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했던 점이 인상적이었다.


러시아 박물관은 좌측 벽처럼 인물마다 설명이 적힌 액자들이 많다. 가문 속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있다. ⓒboybeen러시아 박물관은 좌측 벽처럼 인물마다 설명이 적힌 액자들이 많다. 가문 속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있다. ⓒboybeen
아래의 곰 카펫은 정말 러시아 스러운데, 기억으로는 밟아도 되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근처로 안 갔지만. ⓒboybeen아래의 곰 카펫은 정말 러시아 스러운데, 기억으로는 밟아도 되는 것 같았다. 아무도 근처로 안 갔지만. ⓒboybeen

  

사실 이곳이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이유는 직원분들에게 정말 감사한 칭찬을 들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있는 박물관에는 으레 방마다 무료한 표정의 직원 분(99%로 할머니)이 계시는데, 그날따라 궁금한 게 생겨서 이것저것 물어봤다. 안 되는 러시아어로, 제대로 번역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는 번역기로, 이것저것 어설픈 손동작으로 물어보는 게 또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트루베츠코이의 저택에선 구성 자체가 재미있어서, 어쩌다 세 바퀴 정도를 돌았는데 알고 보니 입장은 마감된 상황이라 모든 직원이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 머쓱한 표정으로 한국에서 러시아를 공부하고 있다고 하니 ‘하로쉬 스투졘트(좋은 학생)’라며 할머니 세 분이 함께 웃으셨다. 지나가는 말일수도 있지만, 나의 방식으로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던 순간에 예상치 못하게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 순간을 계기로 조금은 더 적극적인 여행자로 성장한 것 같기도 하고.


카잔 성당. 외부는 알록달록하지만, 정교회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반전이어서 더 좋았다. ⓒboybeen카잔 성당. 외부는 알록달록하지만, 정교회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반전이어서 더 좋았다. ⓒboybeen
마침 노을이 드는 시간에 방문한 덕에 좋은 순간을 남겼다. ⓒboybeen마침 노을이 드는 시간에 방문한 덕에 좋은 순간을 남겼다. ⓒboybeen


내친김에 더 가보기로 했다. 날씨가 좋기도 했고, 박물관의 할머니들 덕에 자신감도 많이 생겼기 때문. 트램을 타고도 꽤 오랜 시간을 걷다가, 왠지 황량하다고 느껴질 때쯤 카잔 성당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우뚝 솟아있어서 이 역시 찾기 정말 쉬웠는데, 잘못 합성한 사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알록달록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들어가니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실내는 내 예상보다 훨!씬! 화려했다! 알고 보니 정교회 신자들에게 기적을 준다는 성모 마리아 이콘(종교화)이 있어 19세기부터 꾸준한 관심을 받아왔다고 한다. 무교로 살아왔지만 러시아 정교회 신자들의 진심 어린 정성을 볼 때면 왠지 모를 벅차고 성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는데, 특히 평일 오후임에도 가족 단위의 러시아인들을 많이 볼 수 있어 마음도 편해지는 곳이었다.


아쉽게도 더 걸을 컨디션은 아니라서 트램을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처음 트램을 타봐서 티켓을 사는 것부터 엄청 난처했지만 주변에 계신 아주머니께서 또 아주!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서로 ‘따봉’하며 헤어지고선 한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아프니까 익숙한 걸 먹고 싶다는 마음에 들렀는데, 김치찌개와 제육을 러시아 한 복판에서 보니 오히려 기분이 이상해졌다. 기대만큼 맛있었고 소화도 잘 되었지만, 그 기대 이상의 허무함이 있었다. ‘결국 한식에 무릎 꿇은 여행자’가 된 듯한 패배감(?)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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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박 34일,

11개의 도시와 바이칼호수까지!

10,000Km를 넘게 달렸던

2018년 스물셋 여름날의 기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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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프롤로그 : 좋아할 수 있는 일만 하며 살아가고 싶은데, 전공자도 전공자라서 러시아는 무서워요

02 동해항 : 배 타고 러시아 가는 건 영화에서나 봤지

03 블라디보스토크 1편 : 반가움에 '끝내주는 가게'를 소개해주겠다는 술 취한 현지인

04 블라디보스토크 2편 : 잘못 부른 택시가 폭우 속에 20분을 기다리다

05 울란우데 도시편 : 전 세계에서 가장 큰 42톤 짜리 레닌 두상이 있는 도시

06 울란우데 이볼긴스키 다짠편 : “다 끝내고 다시 시작할거야.” 사연 있는 현지인과 사찰을 걷다

07 울란우데 린포체 박샤 다짠편 : 부산(釜山) 사람은 평원에 약해

08 바이칼 호수 알혼섬 후지르마을 입성편 : 편도 6시간, 알 사람은 안다는 호수의 섬

09 바이칼 호수 북부 투어편 : 바다가 없으면 답답하다는 아빠를 호수에서 이해하다

10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1편 : 수영은 못 해도 무작정 IN THE BAIKAL

11 바이칼 호수 알혼섬 카약 대장정 2편 : 카약도, 인생도 뒤집어지기는 쉽지 않아

12 이르쿠츠크 1편 : 유배 귀족들이 일군 시베리아의 파리에서 좋은 학생으로 인정받다

13 이르쿠츠크 2편 : 유노스찌(젊음)섬, 청춘은 그 자체로 노 프라블럼

14 시베리아 횡단열차 : 러시아 군인 앞에서 꺼낸 K-POP이 왜 하필 ‘이등병의 편지’였을까

15 노보시비르스크 : ‘노잼도시’에도 사람은 산다, 그래서 재밌다

16 예카테린부르크 1편 :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에서 마이클 잭슨을 기념하다

17 예카테린부르크 2편 : 치킨텐더를 시켜서 닭날개를 받아도 맛있는 게 여행이다

18 카잔 1편 : 자퇴한다더니 교환학생의 도시를 예습해도 되는 걸까

19 카잔 2편 : 정교회 성당 옆 이슬람 사원에서 느껴보는 연방국의 넓이

20 니즈니노브고라드 : 러시아에서 조국을 수호한 날에 한국 예비군으로서 축하를 받은 사연

21 황금고리 1편 블라디미르 : 으슥한 식당 한 구석 오크통에서 꺼낸 꿀술, 메도부하

22 황금고리 2편 수즈달 : 1,000년 전 방어요새도 이제는 선베드 명당

23 모스크바 1편 : 러시아어 전공자면 성 바실리 성당 앞에서 울어도 주책은 아니지?

24 모스크바 2편 : 모스크바의 871번째 생일, “오늘 모스크바는 잠들지 않습니다.”

25 모스크바 3편 : 지방 사람은 서울 한 번도 결심이 필요한데, 모스크바는 어떻겠어

26 모스크바 4편 : DIY가 취미가 아니라면 마트료시카는 꼭 열어보자

27 상트페테르부르크 1편 :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

28 상트페테르부르크 2편 : 책을 산 게 죄고, 읽는 게 벌이라던 <죄와 벌> 따라 ‘도망’가기

29 상트페테르부르크 3편 : 비행기 시간 남았으면 투어 시켜줄게, 마지막 택시기사님의 호의

30 에필로그 : 스물셋의 나름 괜찮았던 한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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