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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Nov 26. 2023

무감입니다.

    아버지, 오랜만에 뵈어요. 아버지는 저를 보지 못하시지만, 저는 아버지를 뵙습니다.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질책하지는 말아 주세요. 저도 제 인생이 있으니 시간을 내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오는 길에도 협력사에서 실수를 했다는 전화를 받아서 회사로 되돌아갈 뻔했던걸요. 사실 돌아가야만 했는데 박대리님의 조력으로 겨우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 많은 도음을 주시는 분 이거든요. 특히나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요. 그러니까 아버지와는 정 반대의 집합에 계신 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늘 저를 난감하게 하셨잖아. 오늘도 그렇습니다. 조금만 버티시지, 주말에 돌아가시지, 하다못해 오늘 저녁에, 아니, 두 시간만 늦게라도……. 왜 하필 제일 바쁜 시간에 돌아가셔서 저를 난감하게 하시나요.


    언젠가 아버지에게 전화가 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라면 대충 얼버무리고 매듭지을 생각이었을 텐데 이상하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더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목소리라기보다는, 아버지 특유의 말투가 맴돌았습니다. 간헐적으로 내뱉는 헛기침 소리까지요.


    아버지는 돈을 빌려달라고 전화할 때면, 그럴 때만 전화를 하셨지만, '돈'이라는 단어 앞뒤로 꼭 기침을 해대셨습니다. 절대 까먹지 말라는 강조의 의미였는지, 당시녿 부모로서 자식에게 일말의 가책을 느끼신 건지, 그도 아니면 아버지의 무작위한 기침 속에 제가 변변한 의미를 발굴해 낸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번 똑같은, 뻔한, 지루한 상황 속 규칙을 찾으려는 인간의 말초적 본능 같은 것으로요.


    그날의 상상은 유달리 생생하여 순간적으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받은 게 사실이고, 금액이 10만 원이었으며, 오늘 밤까지 돈을 보내야 한다는 의무감과, 100만 원도 아닌 10만 원을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는 자신에 대한 한심한까지 들더랍니다. 제 가치가 고작 10만 원이냐는 반발심이 들 때 즈음, 아버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분노로 일어올랐을 즈음, 핸드폰을 열어 통화기록을 확인하고서야 당신에게 전화가 온 적이 없음을 의식할 수 있었어요.


    참 우스웠습니다. 저는 아버지 번호가 없는걸요. 아버지는 핸드폰이 없으셨잖아요. 그러니 매번 공중전화로, 콜렉트콜 따위로 전화를 거시니 제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3분만 통화해도 거진 커피 한 잔 값이니까. 저는 아버지에게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네. 하고 전화를 끊을 수밖에요. 사실 저는 이것과 저것 모두를 따지고 싶었습니다. 회갑이 넘은 나이가 되도록 종일 술에 취해있는 것도, 소주 살 2천 원이 없어서 제게 전화하는 것도, 제 이름도 잊었으면서 번호는 끝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도. 과거의 아버지까지 꺼내 와 질책하기에는 지금의 당신에게 따질 것도 수만 가지이거니와, 그 시절 이야기만 하면 전화너머 훌쩍대는 당신의 꼴을 보기,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안타까웠던 적이 없습니다.


    되려 안타까움을 빼앗겼습니다. 장례식장에 온 제 지인들은 어쩌면 제가 지녔어야 할 안타까움을 대신 움켜쥐고 있었습니다.

    - 그거, 그 감정, 내 것 아니야?

    -아, 미안, 너 해.

    얼떨결에 그들의 것을 제 것인 것 마냥 되찾을 뻔했지만, '것'은 제 육신의 껍데기만을 맴돌며 거부반응을 일으키더니 다시 주인을 찾아 달아났습니다. 아무래도 감정에도 혈액형이 있나 봅니다.


    저는 모르겠습니다. 제 감정은 무엇인가요. 피를 뽑아 검사할 수도 없는 이 흐릿한 감정의 본질은 무엇이냔 말입니다.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 흘러내리던 저는 검은 양복을 입은 박대리님을 마주하고서야 대략 저녁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괜찮으세요?

    누군가 제게 안부를 묻는 상황은 특히 드물었기에, 그러한 질문을 받으니 당장이라도 정답을 찾아내야만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음, 그러니까, 혹시 제가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해도 될까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금 난감하다고 말해도 될까요? 대리님의 도움이 꽤나 간절하다고 말해도 될까요? 머릿속이 안개로 자욱하여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말해도 될까요?

    -유감입니다.

    유감이라, 그 순간의 저는 대리님께서 정답을 가르쳐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얼추 유감 따위인 것 같습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바구니 안으로, 그러한 구멍 따위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무수한 감정이 쏟아져 차올랐으니. 한 단어로 형용할 수 없는 다채로움의 지옥을 만끽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니 저는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에 담을 수 조차 없어서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해석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사방에서 내리치는 폭포는 중력을 잃고 제 자리를 빙그르르…. 대상이 부재하는 유감은 곧 제 풀에 꺾여 한 마을을, 마음을 쓸어버린 채로 가라앉습니다. 공허 안에는 흔적만이 가득하여.


    아버지, 이제 저는 어떠한 감정도 소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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