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은 아빠도 이제 아빠 인생을 살아
막상 나를 찾아야겠다고 선언(나한테만) 하고 나서부터 오히려 생각이 더 많아졌다. 그 생각의 끝에 즈음에 문득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하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놓아야 하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매일매일 쥐고 있는 그 무엇인가가 뭘까라고 생각해 봤다. 역시 가족이고 아이들이었다. 내가 과연 그들을 놓을 수 있을까? 자신이 충분히 없었다. 왠지 놓은 순간 모든 것들이 엉망이 될 것 같은 기분 때문이었다.
첫째가 태어나던 날이 기억난다. 아내는 진통을 오래 했다. 그 시간만큼 기다리던 나도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물론 아내가 제일 힘들었겠지만 밖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나도 편하지는 못했다. 밤새도록 한숨을 못 잤고 꼬박 하루를 보내고 그다음 날 아침에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 첫째가 세상을 나왔다. 세상은 늘 이렇게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뭔 일이 생기는 일이 많다. 아무튼 그 사이를 못 참고 아내 곁을 떠나 있었다는 죄책감으로 수많은 계단을 엄청난 속도로 뛰어 병실로 다시 올라갔지만 모든 건 이미 다 끝난 상태였다. 아내는 다행히 건강했다. 초산이었고 긴 진통으로 너무 힘들어했다. 역시 생명을 만드는 작업은 어마어마한 것이구나라는 것을 처음으로 직접 알게 된 순간이었다. 첫 아이를 받아 양손으로 가슴에 안아 처음으로 안아본 느낌은 '이게 진짜 나한테 생긴 일 맞아?' 아직도 그때의 사진이 남아 있어서 그때를 다 말해주고 있다.
둘째는 좀 덜 긴장되었다. 아내도 나도 둘 다 그랬다. 그래서 나는 여유롭게 병원 식당에 내려가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나올 시간이 될 때까지 마치 당연히 올 기차처럼 기다렸다. 아내도 두 번째 과정은 수월했다. 첫째 때와 같이 둘째도 내가 잠깐 외출한 사이에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첫째 때처럼 레이저와 같은 속도로 달려가지는 않았고 평소보다 조금은 빠른 속도로 갔을 뿐이었다. 둘째를 안을 때는 제법 편했다. 손은 어떻게 해야 하고 팔은 어떻게 아기를 감싸야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내가 둘째를 좋아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아내와 나의 첫 만남은 조금은 의외였다고 말하고 싶다. 당시 나는 졸업 후 회사 생활 3년 차로 뭔가 터닝 포인트를 찾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그게 결혼 상대나 데이트 상대를 찾는 것은 딱히 아니었다. 그렇지만 뭔가 리프레쉬를 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필요했던 시간은 맞았다. 아내는 동생과 같은 대학 친구의 친구였다. 아버지는 장남인 내가 결혼을 일찍 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생각이 없었다. 몇몇 상대를 소개해 줬지만 모든 게 형식적이었다. 그러다가 아버지도 결국엔 포기하고 잠시 시간을 가지던 그런 시간이었다. 동생이 보기에 상황이 좀 복잡해지고 해서 결국 아내를 소개해 주었다. 그날도 나는 똑같은 반응으로 나갔고 아내를 만났지만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다. 우리는 둘 다 호감이 있었고 짧은 데이트만 하고 바로 결혼하게 되었다. 그 사이 내용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게 나는 나만의 가족을 만들었다.
보시다시피 내가 만든 가족에 남들과 특별한 것이 없다. 다만 아내와 내가 남들처럼 긴 연예를 하고 결혼하지 않은 것 빼고는 그냥 평범한 한 가족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한다.
2003년 8월 8일 둘째가 태어나면서 그렇게 우리 가족은 완성되었다. 그 시간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20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두 가지만 생각했다 - 좋은 아빠가 되자. 자상한 남편이 되자. 남들은 부자 아빠가 제일이라고 말하지만 어차피 부자 아빠는 내가 노력해서 될 수 도 있지만 적당한 운도 따라 줘야 하는 것이라 그래도 순수하게 나만 잘하면 될 수 있는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 그리고 아내에게 '자상한 남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누가 조언을 해 준 것도 아니고 뭔가에 영감을 받아서도 아니고 그냥 나 스스로 그런 목표를 마음에 두고 지금까지 살았다. 그렇다고 특별하다고 생각한 순간은 한 번도 없다. 세상의 모든 아빠 남편들은 나처럼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겠지라고 이해했다. 점수로 치면 그저 나는 평균에서 왔다 갔다 했던 셈이었다. 그때는 적어도 이렇게 심플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살면서 평균도 참 힘들구나라고 느꼈고 입에 단내가 나고 머릿속이 깨지는 고통을 참고 살아야지 겨우 평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살면서 아이들이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갑자기 나를 키워주신 내 부모님이 굉장히 존경스럽고 죄송스럽고 미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살면서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언제까지 좋은 아빠 자상한 남편으로 살아야 하나?'
내 친구가 어느 날 소주를 마시면서 그랬다. '야 인마 그게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당연히 평생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지. 당연한 거 아니야?' 그날 그 말을 들으면서 어찌나 속이 답답하던지.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법이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프로덕트 개발도 시작이 있으면 항상 끝이 있다. 그 끝이 있기에 중간중간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게 되고 마무리되었을 때 오는 희열로 인해 다음 프로젝트가 또 기다려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동기부여가 된다. 그런데 나의 '좋은 아빠, 자상한 남편' 프로젝트는 끝이 없단다. 알고는 있었지만 순간적으로 좀 답답했다.
첫째와 둘째를 낳고 난 후 아내는 육아에 너무 지쳤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 나는 야근에 주말 근무를 달고 살 정도로 바빴고 자연스럽게 유아는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결구 아내는 아팠고 그제야 나는 아이들이 보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다. 아빠로서 무능력해 보였다. 워라밸이 힘든 한국 회사 생활에서는 도저히 바꿀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호주 이민을 결정했다. 지금 보다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희망이 아내와 나를 지배하고 있었을 때였다.
다행히 두 아이들은 호주 학교에 잘 적응했다. 몇 번의 힘든 시간들이 있었지만 먼저 이민온 부모들이 다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애써 아내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완벽한 워라밸을 찾았고 덕분에 많은 시간들을 아이들과 가졌다. 한국에서 하기 힘든 여러 가지 경험들을 같이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나는 친해졌고 아내도 외로운 거 빼고는 다 좋다고 하면서 이민 생활에 점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친척이라곤 아무도 없어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시시때때로 아내와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약간의 우울함을 주는 것이 있었지만 그런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고 어느덧 시드니 공항에 내리면 집에 왔다는 기분이 들정도가 돼버렸다. 아내와 내가 시드니가 이제 우리들의 교향이라고 생각한 시점이었다.
나의 좋은 아빠, 자상한 남편 프로젝트는 중간중간 울퉁불퉁한 길도 있었지만 나름 잘 진행되었다. 그냥 내 기준으로 치면 만족스러웠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두 아이 모두 성장하고 흔히들 말하면 사춘기에 들어갔다. 둘 다 사춘기를 좀 심하게 했다. 처음에는 나름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쉽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결국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했어만 했다. 처음으로 좋은 아빠 프로젝트에 비상등이 켜졌던 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아이들의 멘털을 잡아 주기 위해 그전보다 많은 대화를 하였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우선 그들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다행히 호주 학교들은 아이들의 여러 가지를 신경 써 주는 편이고 특히 멘털 관리에 적극적이었다. 학교에는 항상 카운슬러가 상주하고 있었으며 선생님들 중에서도 그쪽으로 공부를 했고 경험이 많으신 분이 늘 아이들에 관심을 가져 주셨고 부모와 대화를 많이 해 주었다. 우리 아이들도 다른 아이들과 비슷하게 친구관계, 공부, 진학, 외모 등등으로 인해 방황을 많이 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늘 그들의 카운슬러가 되어주었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일은 늘 나의 몫이었다. 학교에도 수없이 갔었다. 일하다가도 가고 어느 날은 휴가를 내고도 학교를 갔었던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나의 호주 직장 상사는 늘 한결은 반응이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했다 - '네 가족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으니 혹시 네 가족에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네가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야'. 그러면서 언제든지 가족을 위해 달려가도 좋다고 말했다. 정말로 한국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말이다.
첫째는 2년을 꼬박 힘들어하더니 결국에는 방황을 끝냈다. 역시 끝이 있는 것이 너무 좋았다. 나도 기뻤고 아이는 더 좋아했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아직도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중이다. 첫째와의 시간들은 힘든 것도 힘든 거였지만 아빠로서 처음 하는 경험이라서 더 나한테는 충격이었다. 아이들이 이렇게 될 수 도 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였다. 상처를 받았지만 해피엔딩으로 끝나서 다행히 상처는 잘 아물었다. 2년 뒤에 둘째 딸아이가 비슷한 과정을 겪으면서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졌다. 원래 처음에 상처가 날 때보다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터지면 더 아픈 법이다.
5년이라는 시간을 지나면서 나의 마음은 너덜너덜해져 버렸고 죽으면 사리가 나올 정도로 인내의 시간들이었다. 아이와의 밀고 당겨야만 했던 감정싸움들과 아내와의 잦은 충돌들은 결국 나를 지치게 만들어 버렸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 되기 프로젝트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동기 부여가 필요했고 터닝 포인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었다. 나는 살고 싶었고 내가 살아야 가족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론을 내렸다. 좋은 아빠 자상한 남편 프로젝트를 잠시 중단하기로. 쉽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냥 1차 프로젝트가 끝났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유효기간이 없는 네버 엔딩 프로젝트가 아니가 여기서 잠시 접고 다시 시작하자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다시 시작하기 전에 대신 다른 프로젝트를 하기로 했다. 내 삶을 사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나는 나름 괜찮다고 말하곤 했다. 친구들에게도 다른 가족들에게도 말이다. 안 괜찮았지만 괜찮은 척하면서 살았던 거였다.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 가족에 문제가 생기면 난 늘 솔루션만 찾곤 했다. 슬퍼하거나 기뻐하거나 힘들어하거나 하는 나 자신의 감정들을 까맣게 무시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작년에 둘째 녀석과 한국 방문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나도 둘째 녀석도 변화가 필요했고 아버지 팔순도 있었고 해서 적당한 타이밍에 단 둘이 다녀왔다. 어느 날 느지막한 시간에 강남의 술집에서 같이 소주를 한잔 한 적이 있었다. 단둘이 술을 마시는 것은 처음이 좀 어색했지만 조심스럽게 내가 딸에게 물었다.
나: '넌 아빠를 어떻게 생각해?'
둘째: '음.... 아빠는 늘 솔루션만 찾으려고만 해'
나: '뭔 말이야?'
둘째: '사람은 힘들면 힘들어하고 화나면 화도 내고 슬프면 슬퍼하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아빠는 맨날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솔루션을 찾으려고만 해'
나 : (그래도 이해가 안 되고 조금은 억울해서) '당연한 거 아니냐?'
둘째 녀석: (아이가 한동안 나를 보더니 이런 말로 마무리를 했다) '내 말은 아빠도 아빠 인생을 살아'
망치로 한 대 맞은 충격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면 늘 내가 해결을 했어야 했고 다른 감정들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해결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것들은 그다음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랬다. 그런 것들이 나를 좋은 아빠로 자상한 남편으로 되게 만드는 길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아이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나는 알았다.
나는 그동안 나를 잃고 살아왔구나.
좋은 아빠 자상한 남편 프로젝트를 중단 한 이후에 가장 먼저 바뀐 것이 바로 내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하는 것이었다.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속상하면 속상하다고. 신기한 것은 이런 감정 표현이 나의 글쓰기에 너무 도움이 되었다. 한 달 안에 책 한 권을 완성했다(아직 내 브런치 서랍 속에만 있다).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선언한 이유는 결국 잠시 쉼이 필요해서였다. 흔히들 슈퍼에서 뭔가를 샀는데 안 쓰고 그냥 두기만 하면 유효기간이 끝나고 냄새가 나고 애초의 가치가 변질되어 버린다. 결국엔 새로 사야 하듯이 지난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나를 버리고 이제 새로운 나를 만들 필요를 느꼈다. 나는 이 쉼을 통해 좀 늦었지만 나를 돌보고 나를 더 알고 나를 위한 일상을 새로 만들 것이다. 새로운 일상을 다시 하루하루 살다 보면 어느덧 일주일이 될 것이며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면 어느덧 한 달이 되고 그 한 달 또 한 달이 모이면 일 년이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올해는 그렇게 살아 볼 예정이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가 뭔가를 계속 바꾸려고 노력하고 아이와 같은 감정의 리듬을 타다 보니 결국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래 가사처럼 let it be.
쉼의 마지막에는 내가 좀 더 단단해져서 다시 중단했던 프로젝트를 복구하고 나의 운명적인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로움이 나에게 충만하기를 소망해 본다.
여보 그리고 얘들아..... 좀만 기다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