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어렵던 정신건강의학과 문턱을 넘었다. 약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꼬박꼬박 잘 챙겨 먹어야 한다는 것이 좀 귀찮기는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아진 것 같았다. 드라마틱하게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세상을 보는 눈이 관대하게 변한 것 같았다.
매사에 투덜거리기만 하던 내가, 잠잠해지니 주변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타인에게 대하는 모습이 사실은, 나에게 대하던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부끄럽게도 했고 내가 불쌍하기도 했다. 그동안 나 스스로에게 얼마나 채찍질을 해댔던 걸까 늘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렸다. 자존감도 바닥이었다. 나는 스스로 참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살았었다.
인생이 아름다워 보이는 마법의 약 같았다. 감정과 신경이 무뎌지니 참 무던해지고 좋았다. 나른해지고, 날 선 신경들이 수그러들었다.
병원에서 발렛주차일을 하며, 대출을 조금 받았다. 에어컨도 사고 이사도 하느라 돈이 좀 필요해서였는데, 빨리 갚아야겠다는 생각에 투잡을 했다.
투잡은 똑같은 발렛이었는데 호텔발렛주차였다. 약 먹으면서 병원 주차팀에서는 이제 일 할 만 해졌는데, 호텔은 달랐다.
사람들이 험했다. 팀장은 무능했고, 얼빵했다. 지시사항을 이랬다 저랬다 뒤바꾸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 번은 과하다 싶을 정도의 주차비를 그날 원칙대로 다 받으라는 지시가 있었다. 팀장이 자리를 비우고, 고객이 출차하는데, 나는 팀장이 시키는 대로 다 받았다. 고객이 뭐라고 해도 지시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팀장이 복귀하고 아까 과한 주차비를 냈던 사람과 다른 일행이 와서 계산을 하는데, 고객이 비싸다고 뭐라고 하니까 팀장이 적당히 깎아서 싸게 주차비를 받았다. 그러면 나는 뭐가 되고, 아까 과한 주차비를 냈던 고객은 뭐라고 하겠는가. 모 백화점에서 15년 발렛을 했다고 자랑하던 팀장이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그 호텔발렛 직원들은 좀 별로였다고 하겠다. 팀장한테 욕하고 당일날 퇴사하거나, 그냥 퇴사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 원인 중에는 고인 물 두 명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팀장이 그들을 감쌌다. 양아치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들 그 둘 때문에 힘들어하다가 그만두곤 했다.
이 바닥이라고 사람들 질이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꼭 그 두 사람 같은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그 둘이 재밌
는 인물들이었다. 둘은 근무시간이 겹치기는 했지만 퇴근 시간이 달랐다. 그런데도 자주 퇴근 후 술을 함께 마셨고, 나는 그들 무리와 어울려야 살아남을 수 있나 하는 고민도 했었다.
약도 병원에서는 효과가 있었는데, 호텔 발렛 양아치들과 함께 일할 때는 소용없었다. 내가 그래도 몇 달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함께 일했던 형님 때문이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같은 나와 성향의 형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용기 있고, 불의를 못 참는 성격이었다.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의와 싸우는 점만 달랐다. 이 형님의 활약으로 양아치들도 활개 치는데 한계가 생겨버렸다. 아주 불편한 대립관계가 팽배한 상태에서도 계속 근무는 이어갔다.
대출을 다 갚고 나서 그만두었는데, 일이 아닌 내부직원들과의 관계가 힘든 것은 이때도 가장 큰 고민이었던 것 같다.
다시 병원 발렛주차 일만 하게 되었다. 병원은 그렇게 질 나쁜 사람은 없었고, 대다수 원만해서 다시 별일 없는 날들이 이어져갔다.
마음 상태가 조금 좋아진 것도 같아서, 의사 선생님이 약을 조금 줄여보자고 했다. 약이 줄고 처음에는 큰 기분차이를 못 느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짜증과 우울감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다시 원상 복귀되는 것 같았다. 절망감이 들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하고 약 없이는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앓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근본적인 치료에 대해 의사 선생님께 물었다. 대답은 차츰 좋아질 것이고, 관리의 개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희망적인 얘기는 아니었다. 우울감과 불안장애를 약 없이 좋아지기도 힘들고, 평생 안고 가야 한다니. 다른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라는 방법도 있는데, 이것도 비용과 여러 가지 문제로 쉽지 않은 치료법이었다.
약을 계속 먹으면 그래도 지낼만했다. 그런데 약이 없으면 다시 안 좋은 기분과 감정들이 올라왔다.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약 없이는 안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