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의사가 왜 하고 싶은데?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 질문
"So, why do you wanna become a doctor?"
미국에서 의사가 되고 싶다 하면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서 귀에 피가 나도록 듣는 질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질문을 들을 때마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진심으로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이유가 너무 많아서 하나를 골라 얘기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의사뿐만 아니라 어느 직업이든 그 일을 왜 하고 싶은지 그 이유가 뚜렷한 사람들이 일을 할 때도 보다 더 행복하고 힘든 일도 더 쉽게 이겨낼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의대 입시를 처음 시작할 때 머리를 싸매며 답을 고민했던 질문이다. 이미 의대진학에 한 번 실패한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전보다 명확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처음으로 의학 그와 동시에 병리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전 글에서도 언급했듯이 중2 때 EBS의 명의, KBS의 생로병사의 비밀 같은 의학 다큐멘터리를 즐겨보면서였다. 보통 의학 다큐멘터리들은 주로 응급실이나 써전들의 일상을 보여준다. 그중에서 나는 수술 장면들을 보는 걸 좋아했고, 수술부위를 흑백처리해 방송에 내보내는 걸 정말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했던 부분은 의사들이 인터뷰를 하며 환자분들의 질병에 관해 설명할 때, 그러면서 시각 자료들을 송출할 때, 그렇게 설명을 보고 듣고 이해하는 부분들이 제일 즐거웠다. 하지만 어렸던 나이에도 써전들이 본인의 개인시간이 많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야밤에도 응급상황에 달려 나가는 모습들을 보고 있자면,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란 두려움이 먼저 앞섰다.
그렇게 "수술"보단 "질병" 자체와 제일 밀접한 의학 분야가 어떤 것이 있나 찾아보면서 병리학이란 분야를 접하게 됐다. 병리학은 의학의 본 무대 뒤, 주로 실험실에서 환자들의 장기조직이나 체액들을 통해 질병의 "진단"을 주로 하는 분야이다. 수술장면을 통해 피, 인체의 장기들을 보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내겐 수술 같은 직접적인 치료 말고도 진단을 통해 환자의 전체적인 치료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이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그렇게 병리학으로 키를 잡게 됐다. 그때 내 나이, 중2였다. 하지만 이 나이가 오히려 의대를 처음 도전하게 된 순간에 독이 되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하고 싶은 진로를 명확히 한 이유로, 나는 주변 친구들의 부러움과 어른들의 감탄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 내 맘속 한편에 나는 또래들보다 앞서가고 있다는 어리석은 자만을 하고 만다. 중2라는 나이에 열정과 처절함이라는 게 뭔지 아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진로에 대해 방황하지 않고 한 길만 쭉 걸어왔기에 이거면 충분하다는 현실에 대한 안주와 함께 결국 나는 의대에 지원하기 직전까지도 병리학에 대한 "관심"을 "열정"으로 바꾸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내가 나 자신에게 많이 하곤 했다. 고1 때 미국에 와 적응기를 지나는 시간이 있었고, 곧바로 미국대학 입시에 뛰어들어야 했기에 병리학을 차치하고 의학과 관련된 활동을 할 시간이 부족했다. 대학에 와서도 첫 해는 또 적응기라는 생각을 하고 2학년 때 조금 정신을 차렸지만 코로나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가 생겨 다시 그럴듯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결국 대학교 4학년이 돼서야 겨우겨우 개인 가정의학과 클리닉을 찾아 Medical assistant로 일을 시작했지만, 이미 그때 나는 의대 원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의대 원서의 가장 첫 질문인 "왜 의사가 되고 싶나요"에 대한 내 대답엔 대학교 4학년의 의학에 대한 성숙한 열정이 아닌 여전히 중학교 2학년의 의학에 대한 순수하고 미숙한 관심이 쓰여있었다. 미국 의대들은 지원자들에게 구체척인 불합격 사유를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왜 진심으로 의사가 하고 싶은지에 대한 대답이 충분하지 않아서였다고 나름대로 생각한다. 어쨌든 1차 서류를 통과하고 2차 면접까지 갔었다는 건 어느 정도 성적이 뒷받침되어 있었다는 증거이겠고, 면접도 내 기준에선 그리 만족스럽진 않았었으니.
그렇다면 나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의사가 하고 싶은가?
내가 내놓은 답은 이렇다. 나는 정말, 진심으로, "의학분야"에 몸 담아서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의사"가 되고 싶냐는 물음엔 아직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것 같다. 의학분야에는 의사 말고도 다른 분야의 직종들이 많다. 간호사, PA (한국에는 아직 없는 개념, 의사와 간호사 중간 느낌?), 의학연구 종사자, 의료기기 관련업종 종사자, 등등 정말 많다. 그렇다면 의학분야에서 좀 더 내 진로를 구체화하려면 다양한 의료분야에 부딪혀가며 경험을 더 해봐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찌 됐건 지금까지 병리학이란 진로를 꿈꾸며 달려왔고, 병리학자가 되려면 의대를 가야 하니, 일단 나는 의대에 재도전할 것이다. 길고 긴 의학교육의 길에서 이미 한번 주춤한 거, 더욱 성급해봤자 다음에 다시 걸려 넘어질게 뻔하니, 재도전하기 전에 좀 더 의학에 대한 열정을 키우기 위해 경험을 더 쌓고 가자란 마음가짐으로 임하고 있다.
그렇게 나는 지금 대학병원에서 갑상선암, 폐암을 다루는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Research technician으로 일을 하며 의학에 대한 관심을 열정으로 바꿔나가고 있다. 하는 일 중, 연구를 위해 병리과에 방문해 수술받는 환자의 몸에서 떼어온 암 조직을 채취받아오는 일이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다. 병리과에 놓여있는 수많은 인체 조직들, 그 주변에 있는 염색약과 처리기기들 모두 실제로 본 건 이 일을 하며 처음이었고, 처음으로 "와, 나 정말 여기서 일하고 싶다"란 느낌이 들었다. 열정을 향한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병리학이라는 분야가 다른 어떤 의학분야보다도 의학연구에 밀접하니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내년 재도전에도 큰 도움이 되리라.
아직 젊다, 열심히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