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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 가을은 언제나 병처럼 찾아온다.

독백 (9)

by 헬리오스


이 계절, 가을은 언제나 병처럼 찾아온다.

독백 (9)


잿빛 가을이 또, 기어이 기어 들어온다.
벌써 나뭇가지의 잎사귀는 누렇게 말라 가고

길모퉁이의 낙엽은 조금씩 썩어 검게 변한다.

가을의 잎들은 아름답게 죽는다지만,

그건 타인의 눈으로 본 미화일 뿐이다.


나는 오늘도 눈을 떴고, 눈을 감았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아무 일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게 더 무섭다. 아무 일도 없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을이 내게 남긴 저주다.


썩는 건 여름의 잔열,

그리고 그 속에 섞여 있던 나의 기억이다.

햇살은 낮게 기울어 내 그림자를 찢는다.

그림자는 늘 나보다 먼저 지쳐 있다.

나는 걸을 때마다 내 그림자를 밟는다.

언젠가 그것이 다 닳아 없어지면,

그때 나는 어떤 얼굴로 서 있을까.


나는 한때 인간이었던 것 같다.


지금은 공중전화 부스 속에서
끊긴 수화기를 붙잡고 허공과 통화한다.
여보세요, 나야. 나, 아직도 여기 있어.


커피 잔에 비친 내 얼굴은
이미 식어버린 국물의 찌꺼기 같다.

한 모금의 열기도 남지 않았다.

텅 빈 컵과 찢어진 입술뿐이다.

사랑이든 신이든, 다들 떠났다.
한 잔 남은 술처럼, 나만 남았다.


밤이 오면 둥근 달빛이 아니라
도시의 매연이 창문을 두드린다.

그 아래에서 나는
내 몸의 이음매들을 더듬는다.
부서지지 않기 위해,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그러나 손끝에 잡히는 건

얼룩진 살과 식어가는 맥박뿐이다.


가을은 신도 악마도 아닌,
그저 나를 조금씩 부패시키는 계절이다.
단풍잎은 불길처럼 아름답지만,
그 불길 아래에서
나는 천천히 식어가는 고깃덩어리다.


누가 나를 기억할까.
누가 나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까.
레코드의 흠집처럼 내 세월은 돌아가지 않는다.
그저 계속 돈다.
돌고, 또 돌다 어느새 바람 속 먼지로 흩어져,

내가 있었던 자리를 스스로 지운다.


그리고 나는 묻는다.
어디쯤 왔나,
이 잿빛 가을의 끝은 언제쯤일까.

오래된 불이 꺼지고,

타다 남은 냄새가 사라지는 겨울이 올까.

그때 나는,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을까.


#가을 #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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