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이렇게 피고 진다 : 연작 (9)
가을빛이 멀리서 천천히, 그리고 끝없이
나를 향해 번져온다.
산천을 가득 채운 색들은
자기만의 호흡으로 숨을 쉬고,
단풍은 오색의 음계처럼
서로 다른 떨림으로 물들어 간다.
붉음은 불꽃의 첫 박처럼 선명하고
노랑은 저무는 해의 긴 음처럼 잦아들며
초록은 마지막 숨결을
작은 쉼표처럼 바람 끝에 남긴다.
그 절경 속에 홀로 선 내 마음도
소리 없이 젖어들며
계절의 박자에 천천히 휩쓸린다.
인연이 가까웠다 하나
몸은 천 리 밖 구름처럼 멀어져 있고,
보고자 마음을 다져도
곁에 없음은 끝내 서늘할 뿐이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온기는
바람 한 겹에 막혀
내 손등을 스치지 않는다.
보고 싶다 말하려 입을 열어도
그대는 없고
말끝만 가벼운 먼지처럼
허공으로 흩어진다.
남기려던 한마디는
입술 앞에서 저절로 닫히고,
어차피 닿지 못할 이름을
나는 굳이 부르지 않는다.
가을의 화려함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속도를 올린다.
붉음은 뛰는 맥박처럼 흔들리고
노랑은 오래된 편지의 가장자리처럼 부서지며
초록의 마지막 바람이 귀를 스칠 때,
이 찬란한 색의 중심에는
그대가 없는 자리에서 태어난
쓸쓸함이 심장처럼 뛰고 있음을
나는 깨닫는다.
아, 가을이여.
너는 어찌하여 이토록 찬란한가.
내 마음은 흐느낌으로 젖어 있는데
너의 화려함은 되레
내 슬픔을 더 깊고 길게 끌어올리는구나.
순간 바람이 불고
낙엽이 원을 그리며 떠오른다.
오색의 잎들은
실은 음악이었다.
내 주변을 천천히 돌며
사라지는 음, 사라지는 빛,
사라지는 온기다.
바람 한 줄기 스쳐 지나가도
그대의 냄새는 없고
색들만 내 어깨를 스치며
가볍게 무너진다.
오색의 낙엽아,
너희 빛은 어찌 이리도 잔인하냐.
너희의 빛은
임 없는 이 가을에
내 눈을 태울 만큼 눈부시구나.
붉음은 찢어진 내 심장 조각 같고,
노랑은 오래 묵은 상처의 고름 같으며,
초록은 임 떠난 뒤 남긴 쓴 숨 같아
숨조차 깊게 쉬기 어렵다.
그러나
곡선이 끝을 향해 내려가듯
모든 광휘도 결국은 잦아든다.
숲이 어둑해지고
바람의 결이 가벼워진다.
남은 것은 임이 떠난 자리와
그 빈자리를 감싸는 가을빛 한 줄기.
그리고 그 사이에 서 있는
내 마음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