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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오 Oct 22. 2024

나를 닮을지도 모를 너에게

너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목요일 아침마다 씹어 삼키는 바람이다. 2,500원짜리를 건너뛰고 3,000원짜리를 거리낌 없이 살 수 있는 500원어치만큼의 진심이다. 이 진심을 먹기까지 10년쯤 걸렸다. 목요일 아침 8시 20분 전후로 나는 교내 편의점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너는 컵라면과 에너지 음료를 먹는다.


나는 전문대에서 한국어 강의 6학점을 맡고 있다. 교수를 꿈꾸지 않는 한 시간 강사는 부업이었다. 본업이 주말에 몰려 있어 이 수업으로 평일 중 하루를 채우면 일주일의 균형이 잡혔다. 이번 학기 3학점을 더 맡아 달라는 요청은 거절했다. 일주일에 두 번 출근은 부담스러웠다. 수업은 내게 금전 문제만은 아니었다. 3학점이든 6학점이든 평일 중 하루의 ‘선생’ 충전, 지금이 아슬아슬하게 적당했다.


나이 마흔 넘어 편의점 테이블에서 아침으로 먹는 3,000원짜리 샌드위치와 1,200원짜리 커피. 교직원 할인 10% 해서 3,780원. 쓰고 보니 궁상맞다. 편의점은 도서관 지하에 있는 학생 식당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히려 편의점 샌드위치 고르는 기준이 가격이 아니라 칼로리여서 당당했다. 대학생 때만 해도 가격만 봤었다. 그런데 칼로리라니, 호밀빵으로 된 샌드위치는 금의환향의 징표였다.


너는 이런 내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와 너는 겹쳐졌다. 너는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 내가 너일 때, 돌이켜 보면 나는 가난했다. 아니, 몇몇을 제외하면 가난은 청춘의 바탕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순간, 해도 되는 것은 많아지는데, 돈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어 할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진다.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만만한 식비부터 줄이기 마련이다. 내게는 빵과 우유, 혹은 삼각김밥이 가장 잦은 외식이었다. 편의점 컵라면은 비싸서 사지 않았다.


절대적 빈곤을 겪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21세기 한국의 보편적 빈곤은 난장이가 공을 쏘아 올리던 시절의 결핍이 아니다. 가난은 200원 때문에 취향을 돌보지 않아야 할 무심함에 있다. 내가 너일 때, 나는 삼각김밥에 취향이 없었다. 1+1으로 묶인 커플삼각김밥으로 남긴 200원과 샌드위치에 행사 상품으로 딸려주는 저가의 음료가 곧 취향이었다. 당시에는 무난했던 식생이 마흔쯤 되면 삭막한 인생으로 무성해졌다. 마흔 넘은 사람이면 으레 동네나 직장 근처에 지인을 대접할 만한 식당 몇 군데는 알거나 고기에도 더 좋아하는 부위가 있었고, 소주나 맥주 혹은 커피에도 이것 아니면 안 되는 취향이, 나는 없었다.


취향은 맹목적인 자기주장이 아니다. 인간관계, 식문화, 술문화 등의 보편 양식 속에서 ‘나’가 존재하는 형식이다. 취향이 없으면 ‘나’란 무형식의 가설이다. 가설은 증명을 요구한다. 직함이나 신념으로도 ‘나’가 증명되지만, 직함은 사회가 요구하는 숫자의 문법이어서 ‘나’가 온전하게 번역되지 못하고, 신념은 취향 중에서도 으뜸이어서 이를 가진 이는 드물다. 증명되지 않는 인생은 딱, 편의점 샌드위치 맛이 난다. 샌드위치이긴 하다.


며칠 전 김과 송이 만나 막국수에 수육을 먹는 사진을 보내왔다. 내가 끼었더라도 다르지 않을 메뉴였다. 우리가 만날 때 추어탕이든 고깃집이든 식당을 이끄는 것은 늘 김과 송이었다. 친구들이 고르는 메뉴는 학창시절 교수님들이 우리를 데리고 가던 데였다. 교수님이라고 해봤자 지금 우리보다 몇 살 많을 뿐인 분도 계셨다. 나는 편의점이라는 작은 호수에 남아 양서류나 파충류를 보는 어류가 된 기분이었다.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한 채 뻐끔뻐끔, 순두부를 넣은 라면이 끓기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고작 300원 더 써서 건면으로 바꾼 것이 내 나잇값이었다.


물론 너는 내가 너일 때보다 비싸게 먹었다. 너는 굳이 1+1음료를 선택하지 않았고, 삼각김밥에 컵라면을 먹더라도 군음식 하나가 덧붙여졌다. 그러나 1인당 GDP가 두 배 이상 성장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는 도긴개긴이다. 부모님이 보시면 그것 가지고 아침이 될까 걱정하시겠지만, 내가 그랬듯 너도 모를 것이다. 생물학적 완성도의 정점에서는 감당 가능한 부실함이었다.


시험 기간이라 이른 아침인데도 편의점에 너는 꽤 많았다. 내가 맛있었듯, 너도 맛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처럼 이곳에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청춘은 네 인생의 소모품이 아니다. 돌도 씹어 먹을 수 있다고 해서 돌을 먹을 필요는 없다. 네 뱃속으로 굴러간 돌은 반드시 청춘이라는 돌을 밀어낸다. 그렇게 쌓아 올린 돌무더기, 이 심심한 아저씨다.


내가 너일 때,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고 있는 교수님을 만났다면 당황했을 것이다. 국립대 교수와 전문대 시간 강사는 비교조차 민망하지만, 여전히 잦은 외식이 된 편의점 샌드위치는 이제 궁상맞고, 그것을 맛있다고 느끼는 사태는 찹찹하다. 자기가 맛있으면 되었다는 다양성 존중은 사양한다. 인근에 파리바게트가 있었더라도, 나는 편의점 샌드위치를 먹었을 것이다. 파리바게트 샌드위치가 더 맛있는 것을 안다. 배달앱에서 할인행사 할 때는 수시로 사 먹었으니 아마도 취향이었을 것이다. 내 무난함이란 궁색함을 감추는 인지부조화일 뿐이다. 내가 호랑이는 아니라도 고양이도 아닐 텐데, 인생을 할인해서 사는 습성에서 도통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네가 나일 때, 과연 너는 편의점을 졸업할 수 있을까? 내 윗세대는 개미의 노력을 미덕으로 삼았고, 나는 헬조선의 중심에서 ‘노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한 시기를 관통했다. 그런데 너는 나보다 더 고달파질 것이다. 네가 도서관에서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결과는 너를 배신할 가능성이 높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적당히 노력하는 베짱이가 득세했다. 혹시라도 네가 스타벅스에 취향을 가졌다면 재앙이다. 그것은 네 부모의 부에서 비롯된 아비투스일 뿐이다. 네 부모만큼 벌지 못하는 한, 너는 취향을 하향해야 하는 ‘노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력’이 필요할 것이고, 너는 네 부모보다 잘 될 가능성이 낮다. 1930년에 태어난 한국인이 겪은 불행이 그 사람 잘못이 아니듯, 네 잘못은 아니다.


고작 내가 되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목요일 아침 8시 20분의 편의점 아침이 살풍경하다. 아마도 너는 Saint Agnes And The Burning Train을 듣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들리는 말도 어렴풋이 예감할 것이다. ‘네 취향 아웃, 네 이름 아웃.’ 그렇게 네가 기린 적 없는 몰취향의 감옥에 남을 것이다, 나처럼. 이 글을 쓰는 필촉이 껄끄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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