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이지만 가족인 걸요
사고 후 한 달의 기록
아빠의 사고 후 한 달이 지났다. 다들 많이 힘들었다. 그래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아빠는 새 차를 계약했고, 형과 나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으며 엄마는 밤에 조금씩 더 잠을 잘 수 있게 됐다. 글로는 참 쉽다. 고작 한 줄로 우리의 삶이 기록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이 한 줄조차 기억에서 희미해질 것이다.
사고 며칠 뒤 우린 가족회의를 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를 관객으로 한 가족회의를 연기했다. 형의 배역도 있었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난 배우로서 내 역할에 충실했고, 형의 부재에 관해 아빠에게 방백을 하는 역할도 추가로 맡았다.
총기획은 엄마 몫이었다. 이렇게 아빠를 내버려 둘 수 없지 않냐며 말을 꺼냈다. 저 인간이 그간 해온 모습이 너무 밉지만 나이 들고 몸 여기저기가 아픈데 노동일을 다시 나가면 어찌하겠냐며 대본을 내밀었다. 엄마는 그간 모아 둔 비상금 얼마가 있다고 했다. 우리에게 나이 들어 신세 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모은 돈이라고 했다. 아빠와 공유하면 또 그 돈으로 사고칠지 몰라서 조용히 모아두었다고 했다. 물론 엄마가 10년이 넘게 노동을 하며 번 돈이다. 그 돈으로 중고 사다리차 하나를 사주자고 했다. 돈이 엄마에게서 나온 줄 알면 아빠에게서 도저히 회수할 방법이 없으니 나와 형이 간신히 융통한 것으로 말하라고 했다.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나는 그저 무기력하게 배역을 맡았다.
“형, 엄마 말 들었지? 말은 내가 다 할 테니까 오늘 저녁에 엄마 집으로 와.”
오후 늦게 카톡이 왔다.
“너 혼자 가. 난 안 간다. 앞으로 가족 같은 거 안 할라니까 내가 돈을 빌려줬다고 하든 네가 훔쳤다고 하든 너 알아서 해.”
난 분노했다. 추석에 하루 먼저 오고 안 오고를 가지고 ‘가족’의 의미를 훈계했던 그다. 이런 게 그가 생각하는 가족인가? 정작 가장 큰 일 앞에선 뒤로 내빼는 모습에 옛날 생각이 났다. 아빠가 우리를 힘들게 할 때, 엄마와 나는 집에 있었지만 형은 집을 나갔고 몇 년간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때와 똑같은 모습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친 말로 형에게 카톡을 퍼부었다. 내게 가족을 말하던 그 잘난 모습은 어디로 갔냐고, 형 결혼할 때 형 돈으로 결혼을 했었느냐고, 제일 힘들 때 이게 뭐냐고 비아냥거렸다.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로 육두문자가 날아오고 잘난 니가 알아서 하라며 거칠게 전화가 끊겼다. 나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쨌든. 그날 저녁 연극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엄마와 나는 오래 호흡을 맞춘 능숙한 연기 파트너다. 엄마가 말을 꺼내고, 내가 받고. 난처한 듯한 얼굴로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보겠다며 엄마에게 말했다. 물론 실제론 아빠를 향해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형도 오늘 안 왔지만 자기 집 사려고 간신히 마련한 돈 다 빼서 준다는 데 너무 미워하지 말라는 말로 쐐기를 박았다. 마음속으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리고 형에 대한 내 오해가 있었음도 알았다.
형은 그 날 아침 아빠와 심하게 싸웠던 것이다. 별것도 아닌 아주 사소한 일로. 자신과 꼭 닮은 형에게 아빠는 지나치다 싶게 늘 화를 내는데 그날도 심하게 형을 잡았다고 했다. 그리 서로 마음이 틀어진 날인데 아빠를 위로하고 연극을 하러 집에 오라니... 나였어도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 오며 미안한 마음에 형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가 심했고, 오해했고, 미안하다고. 아직까지 카톡 메시지 숫자 1 은 그대로 남아 있다.
지난주에 친척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장은 전주였다. 아빠는 두 며느리와 손자까지 대동해 같이 가고 싶어 했다. 골칫덩이 막내의 금의환향을 멋지게 자축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원 가족만이 전주로 향했다. 내 아내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가지 않기로 했다. 형수는 아들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
사고 이후 처음 보는 형이다. 어색했다. 가는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스러져가는 단풍을 놓치지 않기 위함이었는지 도로에는 차가 가득했다. 아빠는 신나 보였다. 고향에 가는 것도 좋고, 다음 날 나오는 새 차를 받을 생각도 좋고, 하이닉스 공장에 몇 달간 하청 일이 잡힌 것도 기뻐 보였다.
결혼식장에 도착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저마다 아빠의 안부를 묻고 꼭 안아주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그래도 삼촌이 쌓은 덕이 많았나 보다’며 덕담을 건넸다. 감사한 일이다.
집에 돌아오기 전 아빠는 친척과 한참을 웃으며 이야기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뻔한 이야기겠지. 화장실에 가며 한 두 마디만 스쳐 들었다.
“아~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어. 기가 막히게 일이 연결됐어.”
하이닉스 공장 일 이야기다. 석 달 일을 하면 꽤 두둑한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일거리가 없는 혹한기에 잘됐다는 말일 것이다. 뭐가 그리 좋을까. 아빠 엄마에게는 1억이 넘는 빚이 더 생긴 건데.. 그 뒤처리를 위해 나머지 가족들이 어찌 사방을 뛰어다녔는데 저렇게 해맑을 수가 있나? 난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한참을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나를 내려주며 형이 말을 걸었다.
“조심해서 들어가. 감기 얼른 낫고.”
“고마워. 형도 조심해서 들어가. 엄마도 피곤할 텐데 얼른 씻고 주무시구요.”
“그래. 네 처도 수능 앞두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해라.”
다시 일상으로. 우리는 또 서로에게 상처 주며 살아갈 것이다. 형과 아빠는 일처리를 두고 왕왕거릴 테고, 엄마는 내게 아빠가 얼마나 엄마를 힘들게 하는지 토로할 것이다. 아내와 형수의 어색한 관계는 기념일과 명절 때마다 재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형과 나는 그때마다 몇 마디 섞지 않은 채 밥을 먹고 돌아올 것이다. 19세기 사람인 부모님과 21세기 여성인 아내는 가치관 차이로 앞으로도 충돌할 테고, 20세기 말 사람인 나는 그 사이에서 고민하고 결정하고 상처를 줄 것이다.
우리 가족은 완벽하지 않다. 사실 평균보다 꽤 많이 이상하다. 그래도 잘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서로를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또 사랑하니까. 그 사랑의 방식이 거칠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한다. 노력하다 보면 조금씩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엉망진창이지만 사랑하는 우리 가족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