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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owa May 19. 2022

아이라인의 정체성

양쌤의 another story14

 “얘는 아이라인을 그리면 밥 사달라고 하고 싶고, 아이라인을 안 그리면 밥 사주고 싶게 생겼어.” 짧은 침묵 후 모두 푸하하하 웃었다. 어느 정도 동의의 웃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아이라인의 역사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1일’ 이런 것도 없이 만나기 시작했던 학교 선배(지금의 남편)의 집에 우연히 가게 된 날이었다. 선배의 어머니(지금의 시어머니)와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다가 “아이라인 그려보지 그러니?” 이런 얘기를 하셨던 것 같다. 한창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던 나는 바로 아이라이너를 사서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선배의 어머니는 포스 가득한 얼굴에 멋진 눈썹과 아이라인, 그리고 매니큐어 곱게 바른 예쁜 손을 가지고 계셨다. 초면에 아이라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일반주택이었던 선배의 집에 갑자기 출몰한 벌레를 본 나는 두 말 않고 휴지를 둘둘 말아 때려잡았던 터라 초면에 이미 내숭이나 체면치레는 초월한 아들의 여자친구였다. 아, 자취방에서 바퀴벌레와 1:1로 대치해 본 사람은 진정 벌레에 본능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내 눈은 초소형 도화지다. 눈을 위한 메이크업 제품들이 제각각 할 일을 찾기 참 좋다. 눈썹과 눈 사이가 넓은 편인데 눈이 작진 않고 약간 돌출형이면서 속쌍꺼풀인 듯 아닌 듯 몇 겹이 주름진 눈은 오래전부터 나의 실험정신을 부추겼다. 고등학교 때 한밤중 공부가 지루해질 때면 쌍꺼풀 테이프로 눈꺼풀을 괴롭히곤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이메이크업 탐구에 들어갔다. 캘리그라피를 할 때나 초상화를 그릴 때 초보치고는 괜찮다는 얘기를 듣는 건 어쩌면 열심히 아이라인을 그려온 덕분인지도 모른다. 1mm의 예민한 차이를 알고 있으니까.

몇년째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비비안 리의 초상화. 비비안 리는 아이라인이 이렇든 저렇든 보면 그냥 기분 좋아지는 눈매를 가졌다.

  가끔 반영구화장으로 눈썹과 아이라인을 한 친구들 거기다 속눈썹 연장까지 한 친구를 보면 너무너무 부럽다. 아침에 세수만 하고 아니 눈곱만 떼도 할 거 다 한 얼굴이니 엘리베이터든 차 안이든 잽싸게 립밤만 발라도 정성 들인 얼굴이 된다. 나는 켈로이드 피부여서 얼굴에 뭘 해보기는 무섭고, 어쩔 수 없이 공을 들여 그려야 한다. 

  바쁜 날은 아이라인이 두껍게 그려지다 못해 크레용으로 그어놓은 듯 뭉툭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면봉으로도 수습이 안 되어 그냥 외출하게 된 날, 나를 본 남편이 말했다. “클레오파트라냐?” 뼈 때리는 한마디. 그래도 할 수 없다. 아이라인이 없는 것보단 낫다. 그리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나는 아이라인 그릴 때 기분이 좋다. 한 번에 잘 그려지면 더 좋고.    


  아이라인 없이 순진해 보이는 눈매도 좋고 아이라인이 자연스럽게 그려진 시원한 눈매도 좋다. 하지만 날렵하게 꼬리를 뺀 아이라인으로 무장해야 하는 날도 있다. 오늘은 꼭 ‘드세게 보여야겠어.’ 그런 날. 많이 웃지 않고 눈에 힘 딱 주고 말해야 할 때, 두껍고도 날카로운 아이라인은 목표한 것 이상의 효과를 준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은 민낯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아이라인 따위를 무기로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내 속마음을 털어 내보여도 무해한 사람들,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리던 얇게 그리던 그리지 않던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나를 바라봐 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늘 가까이 있어서 밥을 사 주기도 하고 또 밥을 사 달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아이라인을 그린다. 오늘은 밥 사달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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