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쌤의 another story14
“얘는 아이라인을 그리면 밥 사달라고 하고 싶고, 아이라인을 안 그리면 밥 사주고 싶게 생겼어.” 짧은 침묵 후 모두 푸하하하 웃었다. 어느 정도 동의의 웃음이었던 것 같다.
나의 아이라인의 역사는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부터 1일’ 이런 것도 없이 만나기 시작했던 학교 선배(지금의 남편)의 집에 우연히 가게 된 날이었다. 선배의 어머니(지금의 시어머니)와 무슨 얘긴가를 주고받다가 “아이라인 그려보지 그러니?” 이런 얘기를 하셨던 것 같다. 한창 메이크업에 관심이 많던 나는 바로 아이라이너를 사서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선배의 어머니는 포스 가득한 얼굴에 멋진 눈썹과 아이라인, 그리고 매니큐어 곱게 바른 예쁜 손을 가지고 계셨다. 초면에 아이라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당시 일반주택이었던 선배의 집에 갑자기 출몰한 벌레를 본 나는 두 말 않고 휴지를 둘둘 말아 때려잡았던 터라 초면에 이미 내숭이나 체면치레는 초월한 아들의 여자친구였다. 아, 자취방에서 바퀴벌레와 1:1로 대치해 본 사람은 진정 벌레에 본능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
내 눈은 초소형 도화지다. 눈을 위한 메이크업 제품들이 제각각 할 일을 찾기 참 좋다. 눈썹과 눈 사이가 넓은 편인데 눈이 작진 않고 약간 돌출형이면서 속쌍꺼풀인 듯 아닌 듯 몇 겹이 주름진 눈은 오래전부터 나의 실험정신을 부추겼다. 고등학교 때 한밤중 공부가 지루해질 때면 쌍꺼풀 테이프로 눈꺼풀을 괴롭히곤 하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아이메이크업 탐구에 들어갔다. 캘리그라피를 할 때나 초상화를 그릴 때 초보치고는 괜찮다는 얘기를 듣는 건 어쩌면 열심히 아이라인을 그려온 덕분인지도 모른다. 1mm의 예민한 차이를 알고 있으니까.
가끔 반영구화장으로 눈썹과 아이라인을 한 친구들 거기다 속눈썹 연장까지 한 친구를 보면 너무너무 부럽다. 아침에 세수만 하고 아니 눈곱만 떼도 할 거 다 한 얼굴이니 엘리베이터든 차 안이든 잽싸게 립밤만 발라도 정성 들인 얼굴이 된다. 나는 켈로이드 피부여서 얼굴에 뭘 해보기는 무섭고, 어쩔 수 없이 공을 들여 그려야 한다.
바쁜 날은 아이라인이 두껍게 그려지다 못해 크레용으로 그어놓은 듯 뭉툭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면봉으로도 수습이 안 되어 그냥 외출하게 된 날, 나를 본 남편이 말했다. “클레오파트라냐?” 뼈 때리는 한마디. 그래도 할 수 없다. 아이라인이 없는 것보단 낫다. 그리고 귀찮을 때도 있지만 나는 아이라인 그릴 때 기분이 좋다. 한 번에 잘 그려지면 더 좋고.
아이라인 없이 순진해 보이는 눈매도 좋고 아이라인이 자연스럽게 그려진 시원한 눈매도 좋다. 하지만 날렵하게 꼬리를 뺀 아이라인으로 무장해야 하는 날도 있다. 오늘은 꼭 ‘드세게 보여야겠어.’ 그런 날. 많이 웃지 않고 눈에 힘 딱 주고 말해야 할 때, 두껍고도 날카로운 아이라인은 목표한 것 이상의 효과를 준다(고 나는 믿는다).
내가 아이라인을 그리지 않은 민낯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아이라인 따위를 무기로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다. 내 속마음을 털어 내보여도 무해한 사람들, 아이라인을 두껍게 그리던 얇게 그리던 그리지 않던 아무 상관없이 그냥 나를 바라봐 줄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늘 가까이 있어서 밥을 사 주기도 하고 또 밥을 사 달라 할 수 있어서 너무 좋다.
아이라인을 그린다. 오늘은 밥 사달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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