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번째 억지
10여 년 전에 회사 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내가 속한 팀의 본부장께서 했던 말이 있다. 이 말은 내가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가장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그 당시 본부장님은 나의 직장인 롤모델이기도 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시간을 못 지키는 것은 스스로의 가치를 깎아 먹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전에도 난 약속 시간에 늦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다른 사람이 늦는 것이 싫다는 말이 아니다. 솔직히 다른 사람이 늦는 것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은 없다. 난 내가 어떤 약속 혹은 정해진 기한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한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데 도착을 못할 거 같은 그 초초함, 그리고 불필요하게 상대방에게 민폐를 끼치는 거 같은 그 느낌과 기분이 너무도 싫다. 그래서 난 적어도 10분 늦어도 5분 전에는 도착하기 위해 노려하는 편이다. 업무를 진행할 때도 due에 맞춰서 일을 배분하고 진행하는 편이라서 일을 함에 있어서도 due를 어겨 본적은 거의 없다. 이건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성향이라서 옳다 그르다의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나는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고 믿고, 그리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살다 보면 습관적으로 지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꽤나 많이 있다. 그 사람들의 특징은 엄청 늦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이 10분 정도, 늦어도 30분 안에는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그러나 거의 아니 절대 정시에 나타나는 법은 없는 것 같다. 이건 나의 경험이라 일반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급기야는 늦게 오면서 한 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들고 나타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늦었음에도 말이다. 이처럼 항상 늦게 오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왜 늦게 올 수밖에 없는지를 생각해 보겠다.
#1. 항상 타이트하게 준비를 한다.
대중교통과 관련된 앱들이 많아지면서, 그리고 그 앱들이 가고자 하는 곳들의 도착 가능 시간을 알려 주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더욱더 준비를 타이트하게 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버스가 언제 올지, 지하철이 얼마나 걸릴지-대략 역과 역 사이가 2분 정도 걸린다는 거 정도만 알던 시절-가늠이 안되던 시절에는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집에서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거의 정확한 시간을 알려 주기 때문에 그것들에 의지한 나머지 약속 장소로 거의 딱 맞게 출발을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네 인생에는 돌발상황 투성이이고 그것이 약속이 있는 오늘 예외가 있을 리가 없다. 무언가를 집에 두고 나와서 다시 가야 하는 경우도, 바로 앞에서 버스 혹은 지하철을 놓치기도, 혹은 오늘은 주말 혹은 공휴일인데 평일 지하철 시간표를 봐서 낭패를 보는 경우 등등 수도 없이 많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런 고려 없이 아무런 돌발상황이 없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시간 계산을 하고 집에서 혹은 다른 장소에서 출발하게 되면 무조건 늦게 되어 있다. 적어도 10분은.
#2. 딱히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이런 사람들 주변에는 늦는 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어차피 말해도 또 늦으니 포기한 것 일 수도 있고 늦는 거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인 경우도 있다. 먼저 온 사람들끼리 어딘가에 들어가 있거나 혼자서 기다린다고 해도 딱히 약속시간에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이 할 일 하면서 기다리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내가 후자의 경우이긴 하다. 난 그냥 누군가와의 약속이 있으면 어딘가 커피집에 들어가서 책을 보고 있거나 아니면 먼저 커피를 한잔 마시거나 하고 있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로 늦는다고 연락이 왔거나 못 온다고 하지 않는 이상 약속시간 좀 늦은 시간에 올 것이기 때문에 그냥 신경 쓰지 않고 기다린다. 아니 기다린다는 표현보다는 그냥 내가 할거 하면서 있는다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떻게 보면 나쁜(?) 버릇을 고쳐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것일 수 있다. 본인도 불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그것에 대해서 불편함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3. 기본적으로 분주하다.
무언가를 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분주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폰을 보고, 폰을 보다 말고 갑자기 빨래를 널고 그러다 다시 앉아서 준비를 하다가 거울을 닦는 등. 이런 사람들은 무언가 눈앞에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지금 하고 있는 일,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하는 일보다 그 눈앞에 있는 무언가를 처리해야 하는 성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외출 준비를 하는데 다른 사람에 비해서 시간이 훨씬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약소 장소로 가기 위해 무사히 출발했다고 해도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가는 길에 올리브영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세일을 한다고 적혀 있으면 혹시 살 물건이 없는지 들어가게 되고 가는 길에 커피집이라도 눈에 띈다면 그리고 커피가 마시고 싶다면 커피까지 사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약속 장소에는 늦게 도착하게 되고 손에는 올리브영 쇼핑백과 커피집 종이컵이 들려 있게 마련이다. 약속시간은 이미 지난 체 말이다.
요즘 같은 봄날에는 약속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올봄은 바이러스 덕택에(?) 본의 아니게 약속을 잡기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야 하는 약속은 있게 마련이고 여지없이 약속에 늦는 사람은 또 늦게 마련이다. 바이러스와 무관하게. 그런 사람들에겐 이 글의 서두에 썼던 글을 다시 한번 정도 마음속으로, 머릿속으로 새겨봤으면 좋겠다. 본인이 얼마나 스스로 본인의 가치를 깎아 먹었는지, 그리고 더 깎아 먹을 가치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인의 가치가 모두 사라지고 나면 본인 주변에 남아 있을 사람이 있을지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