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은 못 참지
비 오는 날 글을 쓰고 있으려니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이가 어미의 젖을 찾듯,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아름다운 풍경에 절로 탄성이 나오듯, 그러니까 비 오는 날에는 파전에 막걸리가 이를테면 나라의 법도 같은 것이다, 요즘 말로 국룰이라고 하는. 파전과 쌍벽을 이루는 김치전은 또 어떤가. 김치전이야 말로 주종을 가리지 않고 모든 술과 어울리는 궁극의 술안주이다. 각종 전통주, 소주류는 물론이고 와인, 위스키, 청주나 백주와도 조합이 기가 막히다. 그래서 비 오는 날 집에서 김치전을 부칠 때면 만드는 내내 어떤 술을 마셔야 할지 고민하곤 했다. 주당의 집에는 각종 주류가 완비되어 있는 게 보통이니까.
비 오는 날에 왜 더욱 파전이 당기는가에 대한 해답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학계와 사회의 논란거리다. 혹자는 그 이유가 추적추적 비 내리는 소리가 전을 부칠 때 나는 지글지글 소리와 닮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혹은 습기 때문에 전 굽는 기름 냄새가 금세 환기되지 않고 더욱 진하에 응축되기 때문에 기름에 절여진 추억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모든 답이 다 설득력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비가 오는 날에 전 부치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장 그럴 듯 한 답은 "모든 날이 술 마시기에 (그리고 전 부치기에) 좋다"는 것이다.
날이 더우면 더운 대로 술 마시는 일은 즐겁다. 너무너무 더운 여름날, 겨우 그늘을 찾아 앉아 옷을 대충 풀어헤친 채로 마시는 술은 더워서 맛있다. 반대로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에서 차갑게 즐기는 술 역시 더운 여름날의 피로를 한 방에 날려주는 약주라고 할 수 있다. 당장 녹아서 뚝뚝 흘러내릴 것만 같은 동남아 우기의 휴양지에서 스콜을 피해 앉아 마시는 맥주 한 잔의 맛은 어떠한가. 수영장 썬배드에 누워 있다가 피부가 너무 구워졌다 싶으면 수영이나 샤워를 한 판 하고 그늘로 피신해 칵테일을 마신다.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답다.
추운 날 마시는 술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종류의 것이었다. 해도 일찍 떨어져 버리는 겨울날 퇴근 후에 커다란 돼지고기 조각이 들어있는 김치찌개에 곁들이는 소주는 그냥 달콤함 그 자체였으니까. 매일 퇴근할 때마다 그 김치찌개와 소주가 떠올라서 발이 동동 굴러질 정도였다. 바깥 추위가 무색하게 콧등에 땀이 맺히는 조합으로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나서면 그 어떤 추위도 무섭지 않았다.
어떤 술은 생명을 지켜주기도 한다. 북반구의 추운 지방에서는 독주가 생명처럼 여겨진다고 하지 않던가. 러시아에서 긴긴 백야의 밤을 보내는데 보드카가 없다면? 서운함을 넘어서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까 러시아 백야의 보드카는 그냥 생명과 직결된 음료이므로, 금주 중인 나도 러시아에 간다면 어쩔 수 없이 보드카를 마셔야만 하게 될 것이다. 가만, 그럼 이제 러시아 여행을 준비해야 할 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