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과의 이별로 힘들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치열하고 바쁜 삶을 살다 보면 마치 자신의 삶은 주변 인물의 죽음, 사고, 그리고 그들과의 이별과 무관한 예외적 상황이라고 느끼게 되지만, 어느 날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비보를 전화나 이메일 등을 통해 전해 듣게 되면 그 사람에게 소홀했던 자신을 원망하면서 머릿 속에서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크고 작은 추억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지하철이든 자가용이든, 버스든지 뭔가를 급히 타고 장례식 장에 들어서면 내가 얼마 전까지 "평생 내 옆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소중한 사람의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나를 맞아주며, 이 때야 비로소 인생의 유한성에 대해 재고하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 평등합니다. 그래서 소중한 누군가와의 이별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스트레스가 큰 요소가 바로 소중한 사람과의 사별이라고 하니 (Bonanno, 2009), 어쩌면 우리는 하루하루 다가오는 "그 날"을 굳이 예상하고 감지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현실에 몰두하거나, 일에 깊이 빠지거나, 돈이나 친구 같은 다른 존재에 감정을 분산해서 투자하며 두려움을 중화시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삶은 태아가 산모의 자궁에서 나오면서 탯줄을 자르는 순간을 기점으로 시작됩니다. 즉 인생의 시작 자체가 이미 타인과의 "결별/단절 (Detachment)"인 것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엄마의 뱃속에서 나온 아기가 엉엉 울면서 새로운 세상에 점차 적응하는 이 과정은 인간이 평생 경험하며 거쳐나가야 할 수 많은 "결별/상실 후 적응과 성장"이라는 인간의 숙명적 기본 단위를 잘 보여줍니다. 돌이켜 보면, 저도 유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 그리고 성인기를 거치며 살아왔는데, 모든 성장의 매듭은 "결별과 상실, 그리고 적응과 성장"을 기본 단위로 해서 반복해 왔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졸업식입니다. 정든 학교 선생님, 급우들과의 이별은 기쁜 일보다는 아쉽고 슬픈 일에 가깝습니다. 남자의 경우, 군입대 역시 그런 성격의 과정이며, 취업, 결혼, 유학, 파견 근무 등이 모두 이런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상실과 성장"은 인간이 평생 경험해야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독자분들 중에는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던 사람과 사별한 뒤 아직까지도 오랫동안 비탄과 통한의 감정(Grief)에 빠져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 감정 자체도 힘들 텐데, 어쩌면 주변에서 적절한 감정적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오히려 상처 주는 결과를 초래한 부적절한 형태와 내용의 위로를 받아서 역효과를 경험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야, 그 분은 이제 하늘 나라에 가셨고, 거기서 너를 보고 계셔"라든지, "이제 다 좋은 일이 되겠지"같은 성급하고 무미건조한 위로가 그런 말들이 될 수 있습니다. 또는 "야 너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힘들어해? 빨리 일어나야지?"같은 격려가 되지 않는 격려의 말도 그런 예가 될 수 있습니다. 독자분들은 그런 상황에서 아마 자기를 탓하거나 ("나는 왜 이렇게 섬약하고 감성적일까?"),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빨리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 아예 자신의 감정을 마비(Numbing)시켜 버린 채 지내는 분 ("나는 괜찮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점이 있다면, 사람 마다 비탄과 통한의 과정을 거치는 방법과 스타일, 그리고 소요 시간은 제각기 너무 다르며, 그런 고유한 패턴과 성격을 본인 스스로부터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그리고 이런 비탄과 통한의 과정은 전철이 지하철역을 지나가듯이 일렬의 순서로 선형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매우 불규칙적이고 개인 고유의 패턴이 있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나 현실적 상황을 지나치게 고려하지 말고 사별로 힘들어 하는 자신에게 충분한 시간과 고인을 애도하고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사별을 경험하게 되면 감정 기복이 기존의 형태와 많이 다른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충분한 현실감도 느끼지 못하는 데다가 고인과의 과거의 추억을 나누던 장소에 의식이 매여있어서 시간의 경과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합니다. 감정적인 기복도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고, 의외로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날부터 밝게 웃으며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또는 장례식이 끝나고 모두가 떠났을 때, 겉보기에는 일상으로 돌아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음 속에는 깊은 분노와 섭섭함이 가득 차서 타인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를 표하며 자신을 고립시키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별자들은 일정 시간을 홀로 고립된 채 (그렇게 보이든 안 보이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개인 공간에서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매듭을 매일 어루만지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별자들이 고립된 상황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감정과 스트레스를 대처하고 보다 원만하게 자기가 원하던 일상으로 복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순적이게도 저는 무척 간단한 최소한의 내용만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설명하고 제시하는 것을 읽으시고 그것을 기초 삼아 자신만의 철학과 전략을 빌드업하시면 그런 상황에서 보다 쉽게 감정을 추스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자신의 상황적 고유성을 철저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별로 이미 3년 이상의 시간을 소모하며 세상과 이웃과 단절한 채 별다른 교류 없이 살아왔다는 것이 곧 본인의 성격이 유별나거나 섬약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사별로 인한 "비탄과 통한의 과정 (Grieving process)"의 소요 시간과 그 질(Quality)을 결정하는 요소는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죽은 자와의 관계 (애착의 종류), 타이밍 (죽음의 시기, 언제 죽은 자를 그리워 할 것인가?), 그리고 사별자가 성장한 집단의 문화적 배경이 영향 요소가 됩니다 (Bonanno, 2009). 고립된 공간에서 주어진 시간을 잘 활용하셔야 합니다. 본인 자신과 죽음을 통해 떠난 사람에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자신의 감정을 보다 보면 감정이 파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보게 될 텐데, 편의상 오는 방향을 부정적인 감정, 가는 방향을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할 때, 감정이 부정적인 순간에는 머리를 비우고, 그 감정을 불필요하게 증폭시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반대로, 감정이 긍정적인 순간이 될 때는 그 긍정성을 최대화해서 그 느낌과 기분을 기억하면 도움이 됩니다 (Bonanno, 2009). 그리고 죽은 그 사람을 떠올리면 감정이 격해지거나 울적해서 일부러 회상을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더 많은 회상과 추억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오히려 감정을 위로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다니시는 분이라면, 매일 퇴근 후 밤 9시부터 30분 동안 그 사람을 추억하고 애도하고 묵상하는 데에 온전히 시간을 사용하겠다고 자신과 약속을 하고 그 시간을 매일 그 사람을 애도하고 추억하며 기억하는 데에만 활용하면 도움이 됩니다. 이런 경우 30분의 시간이 일종의 예식(Ritual)의 시간이 되는데, 많은 학자들이 예식을 꾸준히 갖는 것은 굉장한 힘을 갖게 해 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예식이라는 것이 너무 거창하고 진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쥬스 한잔을 마시면서 그 사람의 사진을 보며 대화를 시도해도 되며, 주말 오후에 둘이서 자주 같이 가던 공원 벤치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마치 그 사람이 옆에 앉은 것처럼 상상하며 대화를 해도 됩니다. 자신만의 창의적이고 진중한 예식을 디자인하시면 됩니다.
둘째, 사별 과정의 프로세스와 메커니즘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별 과정은 당사자가 죽은 사람을 반복적으로 기억하고 기리면서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의 추억을 기억화하여 과거의 폴더에 저장시키는 작업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즉, 반복적 추억과 기억을 통해 과거의 일이 온전히 과거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사별자는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는 나를 의식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조금 더 힘과 동기를 얻게 되면, 이제 나아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서 이제 그 새로운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과 애착을 새롭게 투자하며 인생의 새로운 묘미와 의미를 맛보게 되는 것이죠 (Mitchell & Anderson, 1983). 단, 주지해야 할 것은, 사별 과정과 비통의 과정은 매우 힘들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중간에서 급격하게 일탈한다던가 타인에게 급격하게 의지한다던가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와 점차 떨어지는 연습을 하면서 감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사별자도 초반에는 당장 엄마 품에서 떨어져 나와 울고 있는 아기처럼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을 보기 힘들다는 이유로, 또는 아이가 괴롭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급격하게 참견하거나 동의 없이 도와주면 아이의 성장을 방해하는 것처럼, 사별자를 위해서도 지나치게 과잉적인 도움을 베풀거나 아예 보조자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어 버리면 사별자의 온전한 성장이 방해받게 됩니다. 물론 사별자를 완전히 배격하고 무관심하게 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별자도 일부러 혼자서만 시간을 보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별자 본인이 혼자 감당하고 경험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잘 파악해서 적어도 그 부분만큼은 혼자 감내하고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별자는 어떤 면에서 "이기적인 아기"와 같은 성향이 있습니다. 이런 점을 사별자 본인과 주변 분들이 아시고 잘 배려하며 협동해 나가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나 소요돼도 괜찮으니, 사별자는 본인에게 충분한 시간을 허락해서 자신이 죽은 자와의 관계, 추억, 주고 받은 말들을 의미 있게 재구성해서 기억을 남겨야 합니다. 죽은 자를 기억할 때는 지나치게 좋은 모습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너무 낭만적이고 긍정적인 모습만 편협적으로 기억하면 그 과거가 너무 강해지고 환상이 되어서 사별자가 희망을 갖고 앞으로 나가기가 그만큼 더뎌지기 때문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따라서 죽은 자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균형 있고 온전하게 그리며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건강한 기억화 작업은 사별자가 앞으로 나가는데 큰 힘을 제공합니다. 이 때 사별자는 자신의 깊은 감정을 솔직히 있는 그대로 느끼고(feel), 그 느낌을 표현하고(express), 더 나아가 그런 감정을 타인 및 공동체와 나눌 수(share) 있는 권리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합니다.
셋째, 인간의 유한성과 인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별자들은 인간의 생이 유한하며, 인생은 TV광고에 나오는 화려한 환상으로만 가득 찬 것이 아닌, 질병과 고난, 그리고 슬픔으로도 많이 채워져 있다는 현실감각을 갖게 됩니다. 다만 시간적으로 과거에 묶여있는 경향이 있는데, 의식적으로 "지금/여기"에 참여하고자 노력해야 하며, 혼자 힘으로 그것이 힘들면 본인이 믿을 수 있는 타인과 교류하며 "지금/여기"를 보다 깊이 만끽하고자 해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이 죽은 것을 자신의 책임과 결부 지어 분석하며 죄책감을 느끼거나 분노를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왜(Why?)"라는 질문은 가급적 지금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아내의 경우 "내 남편은 이제 겨우 40대 후반인데, 왜 병에 들어 죽었을까? 그렇게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같은 질문을 하게 될 수 있는데, 이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마음에 분노와 죄책감이 많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설령 천재적인 학자나 전문가가 그 질문에 대해 완벽해 보이는 답변을 구구절절 설명한다고 해도 그 아내는 그 답변을 수긍하지 못할 것입니다 (Mitchell & Anderson, 1983). 사람이 고난을 받는 이유는 우리가 유한한 인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완벽하고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서 매일 인간의 삶은 사건과 사고로 차고 넘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유한한 인간들끼리 상호 서로를 위해 동감하고 격려하며, 비통한 감정을 나누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그런 상호성을 통해 조금 더 덜 유한하고 덜 불안정한 인간으로 삶의 성격을 격상시킬 수 있는데 귀한 도구와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상호 보살핌 속에 사별자는 점차 자신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며, 이제부터는 미래를 향해 한 발짝 씩 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보다 쉽게 할 수 있습니다 (Bonanno, 2009). 그런 사랑과 용기를 통해 사별자는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것을 다시 찾지는 못할지라도 그 와 비슷한 성격의, 또는 보다 새롭고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나고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부족하지만, 사별자들이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은 부분들을 살펴봤습니다. 만약 제 주변에 사별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그 사람의 감정과 생각, 그리고 죽은 사람과의 추억을 말하라고 하고 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이해하며 듣기만 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그것이 제가 그 분의 옆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분 곁을 떠나면서 오늘 밤 그 떠나신 분을 충분히 기억하고 추모하라고, 며칠 뒤 또 만나서 내게 이야기를 전해 달라고 하며 자리를 나서고 싶습니다. 이것이 유한한 인간이 또 다른 유한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무한에 가까운 예의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철,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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