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을 마치고 한적한 아파트 산책로를 따라 걷는데 햇살이 눈부시다. 초록초록한 나뭇잎 사이로 반짝반짝 생기 있게 빛나는 생명력을 보니 '고모레비' 행복감이 밀려와 저절로 눈이 감긴다. 으레 따스한 주말이면 그랬듯 엄마랑 피크닉 하기 딱 좋은 날씨다.
샤워를 마치고 편안한 복장을 한다. 요즘 빠져있는 바닐라루이보스를 진하게 우려 얼음을 가득 채운 텀블러도 챙기고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 한 줄도 포장해서 엄마를 보러 출발한다. 20분 거리에 있는 추모의 공원으로 가는 길은 더 이상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심각한 길치라 어디를 가든 집으로 오는 길조차 내비게이션을 켜야 안심이 되는 사람이지만 이 길은 본능이다.
엄마를 보러 가는 길에 있는 터널을 지날 때마다 매번 '이 터널 끝에 다다르면 블랙홀에 빠지듯, 아니면 시간여행자처럼 시공간을 초월하듯 내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터널을 지날 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고 비슷한 느낌이 들면서 어떤 터널이든 들어서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평온하다. 이 터널만 지나면 흔적 없이 내가 사라지는 상상을 하며 '터널이 계속되면 좋겠다'는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고이는 눈물과 함께 편안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처음으로 웃어 보이는 딸을 보며 '우리 엄마 이제야 좀 안심이 되시겠구나' 한다. 차에서 간단한 피크닉 용품을 챙겨 늘 그렇듯 커피를 마시던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평소보다 밝은 뉴에이지 음악을 틀고, 묘지와 숲이 어우러진 평온한 공원묘지를 내려다보며 김밥을 한 입 가득 넣는다. 세상에 이보다 평화로운 장소가 있을까!
존재하지 않음은 삶의 모든 순간을 無로 만드는데 뭐 하러 아등바등 기를 쓰며 사는 걸까? 다 부질없는 건데... 싶으면서도 어차피 한 번 사는 거 좀 더 가열차고 치열하게 기를 쓰며 살아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남 얘기 하듯 무심한 생각들이 스치며 멍하게 김밥을 먹는다. 매운 멸치김밥을 선택한 덕에 순간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 준다. 루이보스 한 보금으로 평온을 찾기를 반복하며 느릿느릿 함께인 듯 혼자만의 피크닉을 마치고 일어서니 1시간이 훌쩍 넘긴 시간이다.
차 안의 갇혀진 뜨거운 공기가 포근하니 나쁘지 않다. 에어컨 대신에 창문을 조금 열고 꼬불꼬불 산길을 내려 집으로 온다. 다시 만난 터널이 반갑다. 언젠가는 이 터널의 끝에서 신기루처럼 내가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멀쩡하게 터널을 빠져나와 '그때까지는 내 삶을 온전히 가꾸며 살아야지' 현실로 돌아온다.
예약해 뒀던 책을 대출할 수 있는 기간이 다 되어가는 참이라 도서관에 들른다. 올 때마다 멋진 분위기에 감탄을 하면서 머물지는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자리 잡고 앉아 대출한 책을 읽어본다. 몇 장 읽지 않았는데 '어?' 하는 신기한 구절이 나온다.
"... 시간이 있을 때 오게나, 돗자리를 들고. 샌드위치도 챙겨서"
'... 누가 공원묘지 한가운데 돗자리를 펴고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허공에 대고 말을 할까?'